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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여군 입당준비를 위한 성상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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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7 11:06 3,78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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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평양방어사령부에서 5년간 인민군 복무를 했다.
 
내가 군에 입대하는 걸 부모님은 반대를 했지만 난 여성간부의 징표를 위해서 군에 탄원했다. 군복무경력과 입당, 대학졸업이라는 간부징표를 얻어 중학교의 사로청지도원이 되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학교에서 학업성적도 괜찮았고, 인물도 나가는 편이어서 친구들은 물론 담임선생님도 군 복무를 만류했다. 하지만 집안 토대(성분)이 좋은 편도 아니고, 권력도 없는 노동자 집안의 명운을 바꿔야 겠다는 야심으로 군사동원부와 사업을 해서 입대 절차를 밞았다.  
 
이렇게 시작된 군 복무가 저의 인생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오점이로 기록될 줄은 몰랐다. 나는 2002년 3월 양강도 군사동원부에서 최종 신체검사를 마치고 평양방어사령부(91방어사령부)에 배치받아 교환수로 5년의 군시절을 보냈다. 집안 배경은 없었지만 인물이 좋아서인지 평범한 가정의 자녀들이 넘볼 수 없는 병종에 배치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중화군에서 3개월의 신병훈련을 마치고 평양시 상원군에 있는 연대 통신소대 교환분대 교환수로 최종 배치되었다.
 
북한군 복무를 한 여성이라면 그 누구나 체험했을 배고픔과 어려움에 대한 얘기는 그만두고라도 꼭 세상에 알리고 싶은 사무친 원한이 나에게 있다. 그것은 노동당 입당을 위해 버려진 나의 인생얘기다.
 
입당을 위해 한 인간의 성노리개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나의 청춘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지고 눈물이 난다. 군에 입대를 해서 병사시절에는 맡겨진 임무에만 충실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하사관이 되어 입당을 준비하고 전역을 준비하려면 본인의 임무보다 권력자들과의 인간관계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북한 여군의 운명이다. 가정형편이 어려우니 뇌물을 상납할 수도 없고, 가족친척계열에 간부가 없으니 사업도 불가하다.
 
나는 입당을 위해 다른 하사관들보다 밤잠을 거리며 더 열심히 복무했다. 연대 연구실 청소는 물론, 정치부와 참모부 청소는 모두 나의 소견일 정도였다. 하지만 같은 또래 여군 중 나만은 입당 대상으로 추천되지 않았다. 선배들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목적을 달성하라는 말을 할 때 난 깨끗한 몸으로 목적을 이루고 귀향하리라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동기생은 물론 후배들까지도 차레지는 입당추천이 나한테만은 안되었다.
 
연대 조직지도원을 찾아갔다. 그에게 지금까지 남보다 더 열심히 했고, 과오도 없는데, 왜 나만 입당추천이 안되냐고 하소연을 했다. 그는 가정환경이 좋지 않아 좀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누구든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조직지도원은 나에게 자신이 뛰어볼 의향은 있는데, 뭘 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난 뭘 요구하냐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는 시원시원해서 좋다며 저녁에 조용히 만나자고 한다. 저녁 점검이 끝나고 나는 약속대로 조직지도원 방으로 갔다. 방에 들어서니 술상이 차려져 있다. 입당문제로 스테르스를 받았던 나는 권하는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몇잔을 먹었는지 아직도 기억은 없다.
 
하지만 지도원이 불을 끄고 나한테 달려들던 기억만은 있다. 발악하기도 싫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새벽녘에 정신을 차리고 병영에 들어왔다. 그날 난 하루종일 병실에서 울었다. 온 몸이 쓰시고 아팠지만 그 아픔보다 가여운 인생이 서러워 울었다.
 
조직지도원과의 교재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오라면 오고, 벗으라면 벗었고, 밤을 쇠자면 쇘다. 그런 관계가 2~3개월 흘러갔는데, 드디어 내가 입당추천대상자로 선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듣고 기쁘지 않았다. 지도원에게는 말을 못했지만 나의 몸에 태아가 생겼던 것이다. 전우들이 눈치 챌가봐 목욕탕도 함께 못갔다. 후보당 입당을 위한 사단비서처 심의까지는 1개월이라는 기간이 더 있었다. 당시 난 임신 3개월이었다. 죽으나사나 벗터야 한다는 생각에 피복과 서기(하사관)에게 포좌혁띠 두개를 부탁했고, 배를 혁띠로 조였다. 
 
보름정도 남았는데, 일이 터졌다. 혁띠로 배를 너무 조여서인지, 하열이 시작된 것이다. 분대원들이 소리를 치며 지휘관들을 찾는다. 나는 생리현상이라고 말했지만 지휘관들은 믿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근의소(의병소)에 끌려가고 말았다. 울며 몸부림치며 의병소로 안가겠다고 생떼를 쓰던 생각은 나는데, 눈을 떠보니 의병소 침실이다. 잠시후 간호사가 다가와 내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신을 잃었었다며, 6시간만에 정신을 차렸다는 것이다.
 
순간 억장이 무너지고 하늘땅이 맞붙는 듯한 고통이 언습해 왔다. 모든 것이 끝났고, 망해버렸다는 절망감에 울음을 터뜨렸다. 간호사는 유산도 작은 해산과 같으니 울면 바람이 둔다며 나를 달랬다. 하지만 나의 몸부림은 온밤 계속되었다.
 
의병소에서의 퇴원, 처벌제대 명령서 접수, 눈물 속에 부대를 떠나 수백리를 걸어 귀향하던 그 모든 순간순간이 나의 가슴 한구석에 아직도 사무친 원한으로 새겨져 있다. 그때 내가 데리고 있던 병사가 대한민국에 있다. 제대명령을 받고 배낭을 메고 부대 정문밖을 나올때 모멸찬 눈으로 인사도 않던 그도 나와 비슷한 경력을 새겼다. 다른 것이 있다면 입당준비를 위한 성상납이 무리없이 진행되었다는 것 뿐이다. 
 
대한민국에서 만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분대장동지! 그때는 미안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아니, 나한테 미안할 일이 아니다. 여성이고 싶어하는 북한의 여성들의 운명을 비참하게 만든 독재자를 증오할 일이다" 라고.
 
나는 북한의 여군들에게 말하고 싶다. "여성이 되려면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고.
 
탈북여군 김순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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