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경계령과 허약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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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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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에는 고된 훈련강도에 비해 보급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영양실조에 걸린 허약군인들이 많다. 나도 한때 영양실조에 걸려 8개월간 병원 침상에서 보양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다.
1998년 2월, 강원도 고산군 위붕리에 위치한 806훈련소 3여단 2대대에서 4년차 군복무를 하던 때에 부대에 특별경계령이 하달된 적이 있었다. 모든 기계화부대들은 기동훈련에 동원되었고 부대 군인들도 야외훈련으로 진입하였다. 보병전술훈련, 숙영훈련, 진지차지훈련, 야간기동훈련 등 박센 훈련은 10일째 계속되었다.
보통 기동훈련을 진행한다고 하면 제일 좋아하는 부대는 기계화부대들이다. 이유는 기동용 연유공급이 되어 오랜만에 조향을 잡을 수 있고 외부에 연유를 팔아 돈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기계화포병도 그러하지만 우리 보병들 역시 기동훈련을 손꼽아 기다린다. 훈련강도는 세지만 그래도 뭔든지 실컷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심리때문이다.
훈련에 진입한 첫날부터 습격전은 시작되었다. 분대는 분대장과 부분대장을 책임자로 두개 조로 편성이 되었다. 분대장조의 목표는 염소목장이었고, 부분대장이 책임자인 우리조는 농장종곡창고였다. 종곡을 흠쳐 마을에서 술과 바꾸어 오는 것이 최종 임무수행이다.
훈련이 끝나고 분대마다 천막을 설치하고 취침준비에 들어갔다. 대대장교들이 저녁점검에 나와 인원을 살피고 천막을 돌며 최종 인원을 확인하였다. 주위가 조용해진 야심한 밤 1시, 습격전투는 시작되었다. 우리조는 위붕리 관리위원회 종곡창고를 향해 전속으로 질주했다. 행군을 할 때에는 발목이 시큰둥거리고 허리가 아파 걷지 못하겠다고 생떼를 쓰던 막냉이 전사놈도 아예 날아다닌다. 15리 정도 되는 길을 30분도 안되 당도했다.
부분대장은 나와 다른 친구를 내세워 경비상태를 정찰하란다. 살금살금 다가가 들여다보니, 석유등잔을 켠 경비실안에 두명의 경비원이 경쟁적으로 코를 골고 있다. 그때만큼 코고는 소리가 그리도 반갑고 고마웠던 적은 없다.
우리 선발대의 신호를 받고 부분대장은 병사한명을 데리고 창고지붕으로 올라갔다. 기와장을 들고 구멍을 낸 다음 종곡 창고로 들어갔다. 경비병들을 대비해서 보초를 서던 우리둘 중 한 친구가 지붕으로 보충되었다. 결국 경비생은 내 몫이 되었다. 나는 열쇠고리에 빗장을 지루고, 경비실의 전화선도 절단했다.
긴장한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지붕으로 꺼내진 종곡마대 4개가 바닥에 내려졌다. 한명이 한마대씩 어깨에 메고 달리기 시작했다. 종곡창고를 떠나 200미터쯤 왔는데 경비실 쪽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빗장을 지른 문을 뜷기는 역부족이다. 우리는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20여리를 걸어 마을에 다른 마을에 들어선 우리는 술을 하는 집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벽 3시 경이라 술을 뽑는 집을 찾기가 조련치 않았다. 부분대장은 하는 수 없이 철수령을 내렸다. 흠친 종곡을 구석진 곳으로 옮겨 놓고 부대로 돌아왔다.
종곡을 외진 곳에 감추기는 했지만 그것을 놓고 떠나자니, 누가 가지갈 것 같은 불안감에 마음이 아팠다. 나와 병사들은 다문 얼마만이라도 가지고 가려고 주머니가 있는대로 벼를 쓸어 담았다. 부대에 들어와 훈련에 참가했는데, 정말 하루가 그렇게 길줄이야.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나를 비롯한 병사들이 주머니에 채워온 벼를 손으로 비벼 먹었는데, 탈이 난 것이다. 온몸이 떨리면서 눈앞이 안보이며 구토와 설사증세를 보였다. 그다음 기억은 없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다. 원인은 시약처리한 종곡을 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부터 영양실조에 걸렸다. 가끔 정신을 잃을 만큼 증세는 심했다.
그때 함께 습격조에 참가했던 친구 한명이 죽었다. 그 사건으로 분대장과 부분대장은 법적 처벌을 받았다. 훗날 전역해서 부분대장을 찾았었다. 농촌마을이었는데, 부분대장은 자신이 직접 농사지운 쌀이라면서 쌀밥을 한상 차렸다. 서로 마주보며 말은 없었지만 그때 사건에 대한 가슴아픈 추억이 되살아나 가슴이 찟겼다.
그렇게 헤여졌던 부분대장을 대한민국 서울에서 만났다. 남한에서는 먹을 걱정이 없고 모든 것이 풍족하다보니 지난날의 추억이 더 빨리 지워지는 것 같다. 잊지 말아야 죽은 친구한테도 미안하지 않겠는데.
난 통일이 되면 고향에 쌀을 지고 가련다. 그래서 굶주림에 지친 친구들에게 쌀밥을 실컷 먹이고 싶다. 또 우리가 남한땅을 점령하면 허리띠 풀어놓고 먹을 수 있다던 그 쌀을 내가 너희한테 선사한다고 자랑하고 싶다.
북민전 회원 차명국
1998년 2월, 강원도 고산군 위붕리에 위치한 806훈련소 3여단 2대대에서 4년차 군복무를 하던 때에 부대에 특별경계령이 하달된 적이 있었다. 모든 기계화부대들은 기동훈련에 동원되었고 부대 군인들도 야외훈련으로 진입하였다. 보병전술훈련, 숙영훈련, 진지차지훈련, 야간기동훈련 등 박센 훈련은 10일째 계속되었다.
보통 기동훈련을 진행한다고 하면 제일 좋아하는 부대는 기계화부대들이다. 이유는 기동용 연유공급이 되어 오랜만에 조향을 잡을 수 있고 외부에 연유를 팔아 돈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기계화포병도 그러하지만 우리 보병들 역시 기동훈련을 손꼽아 기다린다. 훈련강도는 세지만 그래도 뭔든지 실컷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심리때문이다.
훈련에 진입한 첫날부터 습격전은 시작되었다. 분대는 분대장과 부분대장을 책임자로 두개 조로 편성이 되었다. 분대장조의 목표는 염소목장이었고, 부분대장이 책임자인 우리조는 농장종곡창고였다. 종곡을 흠쳐 마을에서 술과 바꾸어 오는 것이 최종 임무수행이다.
훈련이 끝나고 분대마다 천막을 설치하고 취침준비에 들어갔다. 대대장교들이 저녁점검에 나와 인원을 살피고 천막을 돌며 최종 인원을 확인하였다. 주위가 조용해진 야심한 밤 1시, 습격전투는 시작되었다. 우리조는 위붕리 관리위원회 종곡창고를 향해 전속으로 질주했다. 행군을 할 때에는 발목이 시큰둥거리고 허리가 아파 걷지 못하겠다고 생떼를 쓰던 막냉이 전사놈도 아예 날아다닌다. 15리 정도 되는 길을 30분도 안되 당도했다.
부분대장은 나와 다른 친구를 내세워 경비상태를 정찰하란다. 살금살금 다가가 들여다보니, 석유등잔을 켠 경비실안에 두명의 경비원이 경쟁적으로 코를 골고 있다. 그때만큼 코고는 소리가 그리도 반갑고 고마웠던 적은 없다.
우리 선발대의 신호를 받고 부분대장은 병사한명을 데리고 창고지붕으로 올라갔다. 기와장을 들고 구멍을 낸 다음 종곡 창고로 들어갔다. 경비병들을 대비해서 보초를 서던 우리둘 중 한 친구가 지붕으로 보충되었다. 결국 경비생은 내 몫이 되었다. 나는 열쇠고리에 빗장을 지루고, 경비실의 전화선도 절단했다.
긴장한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지붕으로 꺼내진 종곡마대 4개가 바닥에 내려졌다. 한명이 한마대씩 어깨에 메고 달리기 시작했다. 종곡창고를 떠나 200미터쯤 왔는데 경비실 쪽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빗장을 지른 문을 뜷기는 역부족이다. 우리는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20여리를 걸어 마을에 다른 마을에 들어선 우리는 술을 하는 집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벽 3시 경이라 술을 뽑는 집을 찾기가 조련치 않았다. 부분대장은 하는 수 없이 철수령을 내렸다. 흠친 종곡을 구석진 곳으로 옮겨 놓고 부대로 돌아왔다.
종곡을 외진 곳에 감추기는 했지만 그것을 놓고 떠나자니, 누가 가지갈 것 같은 불안감에 마음이 아팠다. 나와 병사들은 다문 얼마만이라도 가지고 가려고 주머니가 있는대로 벼를 쓸어 담았다. 부대에 들어와 훈련에 참가했는데, 정말 하루가 그렇게 길줄이야.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나를 비롯한 병사들이 주머니에 채워온 벼를 손으로 비벼 먹었는데, 탈이 난 것이다. 온몸이 떨리면서 눈앞이 안보이며 구토와 설사증세를 보였다. 그다음 기억은 없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다. 원인은 시약처리한 종곡을 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부터 영양실조에 걸렸다. 가끔 정신을 잃을 만큼 증세는 심했다.
그때 함께 습격조에 참가했던 친구 한명이 죽었다. 그 사건으로 분대장과 부분대장은 법적 처벌을 받았다. 훗날 전역해서 부분대장을 찾았었다. 농촌마을이었는데, 부분대장은 자신이 직접 농사지운 쌀이라면서 쌀밥을 한상 차렸다. 서로 마주보며 말은 없었지만 그때 사건에 대한 가슴아픈 추억이 되살아나 가슴이 찟겼다.
그렇게 헤여졌던 부분대장을 대한민국 서울에서 만났다. 남한에서는 먹을 걱정이 없고 모든 것이 풍족하다보니 지난날의 추억이 더 빨리 지워지는 것 같다. 잊지 말아야 죽은 친구한테도 미안하지 않겠는데.
난 통일이 되면 고향에 쌀을 지고 가련다. 그래서 굶주림에 지친 친구들에게 쌀밥을 실컷 먹이고 싶다. 또 우리가 남한땅을 점령하면 허리띠 풀어놓고 먹을 수 있다던 그 쌀을 내가 너희한테 선사한다고 자랑하고 싶다.
북민전 회원 차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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