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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전문가논단

학창시절 '정성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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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31 19:06 2,00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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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수령에 대한 충실성의 경력이 학력보다 더 우선시 된다. 물론 충실성의 경력은 기회를 만나 한순간에 이루는 행운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년 시절부터 끊임없는 노력과 시간의 연속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자녀를 둔 부모들의 심정은 남한이나 북한이 같을 것이다. 자기 자식이 그 누구보다도 잘 되어 사회에서 떳떳하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들의 소원일 것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을 키우는데 온갖 심려를 기울인다. 지식과 건강, 도덕과 품성 등 모든 면에서 자식이 성숙하도록 열정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은 지구상 모든 부모의 공통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 어디에도 없는 부모의 노력과 당부가 북한에 있다. 수령에 대한 충성 경력을 쌓기 위한 노력과 당부이다. 북한의 모든 학생들과 군인들은 조직에서 제정된 일과표대로 정성작업에 동원되지만 모두 동일한 충성 경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학창 시절에는 학교에 등교하면 학급별로 김일성· 김정일 혁명역사 연구실과 현관(홀)에 있는 김일성· 김정일 유화물, 각 교실에 있는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액자사진), 교시판(김일성, 김정일의 훈시를 도형글자로 만든 액자)에 대한 정성작업부터 시작한다. 그것도 가장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참가해야 한다.

 

부모님들은 김일성· 김정일 생일이나 국가명절을 맞으면 정성걸레나 밀대를 비롯한 작업 도구를 만들어 보내거나 새벽에 자식을 깨워 자식들의 충성 경쟁에 일조한다. 군에 입대해서는 짜인 일과생활과 전투· 정치훈련으로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충성’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움직여 주지 않는다. 정말 신체가 하자는 대로 하다보면 칭찬은커녕 남한테 뒤쳐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나는 8살 때 소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정성작업’에 참가하였다. 함경북도 청진시 송평구역 송림동에 위치하고 있는 김일성, 김정일의 현지교시 사적비에 대한 청소였다.

 

이 사적비는 김책제철연합기업소에 대한 김일성, 김정일 지시 내용을 수록한 대형 대리석이다. 제철소 주변에는 김일성· 김정일 연구실을 비롯한 이런 사적 건물과 비석이 몇 개 있었다. 주변의 모든 건물들이 제철소의 철가루와 먼지로 검고 칙칙하여 본연의 색을 잃었지만 사적 건물과 비석들만은 선명한 자태를 당당히 유지하고 있다. 그만큼 엄격히 관리되고 있는 것이다. 사적지에 대한 관리를 전담하는 인원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주민들과 학생들의 자발적인 ‘정성작업’에 의해 이처럼 깨끗한 자태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북한의 학급은 같은 거주지와 동네별로 학습반을 조직하는데, 방과 후 함께 학교에서 준 과제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다. 숙제도 함께 하고, ‘전사자가족 돕기’와 고물 모으기와 같은 일도 함께 한다. 하지만 ‘학습반’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새벽에 일어나 함께 ‘정성작업’을 하는 것이다. 내가 소학교 시절이었던 80년대까지만 해도 부모들은 새벽에 자식을 깨워 빗자루와 물바켓쯔(물 양동이)를 쥐어주며 사적지 청소에 내몰았다. 이유는 학습반장이 조기 ‘정성작업’에 대한 출석 장악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정성작업’에 빠지면 학교에서 비판을 받을 자식을 생각해서 그러기는 하지만 충성경력을 제대로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에서 더더욱 자식의 단잠을 깨우는 것이다.

 

나는 초등 2학년 때 소년단에 입단을 하면서 학급의 분단위원장(소년단 조직책임자)을 하였다. 나의 임무는 학급학생들의 정치조직을 책임지고 관리 통제하는 것인데, 학교 소년단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조직분공주기, 주 생활총화, 충성운동 등을 앞장에서 주도하고 관리· 통제하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서는 학습반별로 조기 ‘정성작업’ 정형을 순회하기도 하고 방과 후 담임선생과 함께 동네 학습반들을 돌아다니며 운영 실태를 파악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학생들의 사상을 항상 감시하고 지도하는 정치담당 학생이다. 학급장이 행정담당이라면 분단위원장은 정치담당이다. 당에 대한 충성심을 잣대로 한다고 하지만 부모님들의 직업에도 적지 않게 관계가 된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여 4학년이 되면 ‘사로청’(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에 가맹한다. 사로청 시절에도 조직 책임자인 초급단체위원장의 직무를 맡았다. 임무는 소년단 조직생활 때와 비슷했지만 충성경력에서만큼은 차원이 다르다. 소년단 시절에는 학교와 부모의 강요나 당부에 의해 맹목적인 충성 행보를 했다면 ‘사로청’ 시절부터는 의식적인 충성경쟁에 뛰어든다. 충성 경력이 운명개척의 결정적인 카드라는 인식이 들면서 스스로 충성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자각적인 노력과 습관을 들이는 기간이기도 하다. 청년기에 들어서 정치담당 학생은 권세가 있다. 사회로 진출할 때 필요한 평정서를 써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급적 잘 보이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나는 아버님의 당부로 일요일 새벽마다 포항구역에 있는 김일성 동상을 찾아 ‘정성작업’을 하였다. 중학교 4학년 때부터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만 3년 기간 나의 ‘충성경력 쌓기’는 계속되었다. 1987년 중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일요일에 나는 강한 비바람으로부터 동상 주변의 나무를 구했다고 하여 일등공신이 되었다. 사실 새벽녘에 강풍이 불어 동상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는데, 아버지가 다른 날도 아니고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에는 꼭 나가보라고 하셨다. 바람에 동상 주변의 나무들이 뽑힐 수도 있으니, 나무보호대를 가지고 나가보라고 하셨다. 밖에 나가기가 싫고 비바람에 몸이 가다들었지만(매우 빳빳하게 되면서 오그라졌지만) 아버님의 말씀대로 지지대와 삽을 들고 동상으로 향했다.

동상에 도착하니 동상관리원들이 강풍에 나무가 넘어지지 않게 하려고 끈을 매고 보호대를 설치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들과 함께 끈으로 나무를 고정하고 나무가 넘어지지 않게 지지대를 세우며 분주히 움직였다. 반나절 동안 힘겨운 ‘전투’를 벌렸다. 그때 동상보위를 위해 자진 출석한 학생은 나를 포함하여 10명 정도 되었다. 동상관리부에서는 나의 공로를 도당에 보고하였고, 학교에도 통보해 주었다. 나는 중앙당에서 발부한 모범학생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학교 ‘사로청’ 조직에서는 나의 생활평정서에 3년간 수령에 대한 높은 충성심을 가지고 ‘김일성 동지의 동상’에 대한 정성작업을 했다는 경력을 썼다. 이것은 그 사회에서 영광으로 취급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를 하여 생활하면서 나는 학창 시절에 쌓은 나의 충성 경력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았다. 병사에서 하사관으로의 승진, 노동당 입당, 마지막 전역을 하면서 대학에 입학하는 전 과정에서 중학교의 충성 경력이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군 생활을 하던 1996년 8월, 부대는 갱도공사에 동원되었다. 작업 교대를 끝내고 갱 밖으로 나오는데, 중대 정치지도원(정훈장교)이 나를 부르더니 대대 정치부에 가 보라고 한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당황했지만 나를 마주보며 웃는 정훈장교를 보니 나쁜 일 같지는 같았다. 은근히 마음속으로 기대되기도 하였다.

 

대대 정치부에 도착하여 방문을 두드렸다. “소좌동지! 하사 김수철 명령대로 왔습니다.” 라고 보고를 하고 대대 정훈장교 앞에 섰다. 정치지도원은 일어서더니 “수철 동무! 축하합니다.” 하는 것이다. 순간 심장이 쿵쿵거렸다. 지도원은 “동무는 당의 크나큰 신임으로 조선로동당 입당 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내 계산대로라면 나는 아마도 내년 봄이나 여름쯤의 순서로 될 줄 알았는데, 예상을 뒤집고 거의 1년 앞당겨 기회가 온 것이다. 결국 충성경력의 힘이었다. 나는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부대생활을 하면서도 공휴일을 이용하여 부대 연구실에 대한 정성작업을 끊임없이 진행하였다. 남들보다 체력이 약하여 일부 훈련에서 뒤지는 부분이 있었지만 충성경력 쌓기를 위한 일과는 드팀없이(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해왔고, 결국 그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전 조선인민군 중위 김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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