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출신 군사교관을 통한 대적교육

운영자
2014-05-17 12:36
1,620
0
본문
내가 군대에 입대하기 전인 1980년대 말까지 북한의 TV에서는 공화국으로 의거입북한 남조선 군인들의 기자회견이 종종 있었다. 대략 1년에 2~3회 있은 걸로 기억된다.
주민들은 그들의 증언을 들으며 신비해 했고 알게 모르게 그 속에 감춰진 자유와 진실 같은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예를 들면 ‘남조선에서 일자리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말을 들으면 ‘그래도 남조선에서는 개인의 의사에 따라 직업을 구할 수 있는가 보다. 공화국은 모두 노동당에서 배치하는 것뿐인데…’ 하고 추측을 한다.
또한 ‘매일같이 노동자 농민들이 정부를 반대하여 시위를 벌인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와! 신기하다. 공화국에서 노동당과 정부를 비판하는 시위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모두 탱크로 짓뭉겨 버리겠지…’ 하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역설적인 이러한 부작용으로 1990년대부터는 월북한 남조선 군인의 TV 출연이 서서히 없어졌다. 사실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방법이 달라졌다. 이때부터 인민군 각 부대별로 순회하면서 현장에서 특별 강연으로 대체했던 것이다. 그것을 인민무력부 정치국 선전선동부에서 주관했으며 그에 대한 효과는 나름대로 있었다고 본다.
조작된 남한의 현실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주기보다는 혁명의 무장을 들고 전초선에 선 군인들에게 전문적으로 알려주려고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실용적인 교육을 했던 것이고 이는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1990년부터 1999년까지 황해남도 신천군 온천리에 위치한 총참모부 정찰국 소속 60저격여단에서 군사복무를 했던 나는 세 번 정도 남조선 실정계급교양강연(남조선에서 입북한 군인이나 주민들이 연사로 나서는 강연)을 들었다.
모든 내용은 엇비슷한데 그 중 한 개만을 소개한다.
1997년 여름 여단본부 운동장에서 들었는데 참가자는 대략 2,000여 명 정도였다. 대형 스피커가 달린 방송차(일본제 닛산 봉고차)에 올라 한 시간 동안 강의를 했던 당사자는 남조선 전연군단 병장으로 있다가 74년 입북한 사람이었다.
그는 ‘수령님과 장군님의 품’이 그리워 38선의 철조망을 뚫고 용감하게 공화국으로 왔다고 한다. 그는 유년 시절에 먹을 것이 없어 거지생활을 했고, 남동생은 굶주림에 병이 들어 약한 첩 써보지 못하고 죽었고, 여동생은 빚에 외국으로 팔려갔다고 했다.
그는 남조선 군인들은 미제의 졸개들이기에 아무런 군사작전 권한이 없다고 유난히 강조하였다. 계절마다 진행하는 군사작전에서 미군의 명령 하에 온갖 민족적 차별과 인격 모욕을 받으며 군인생활을 한다고 하였다. 장교들의 기합과 구타에 못 이겨 자살자가 끊이지 않는 ‘괴뢰’ 군 부대에 더는 삶의 희망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대학을 다니다가 국군에 강제 징집되어 노예 같은 군인 생활을 했다고 실토하였다. 그는 남조선 인민들은 북녘의 사회주의공화국을 마음의 고향으로, 삶의 등대로 생각하며 자나 깨나 공화국의 품에 안기기를 소원하고 있다며, 본인도 ‘수령님’의 사상과 통일정책을 지지하여 학창 시절부터 북한에 대한 동경으로 자주통일을 위해 싸웠다고 했다.
또한 공화국에 총을 겨누었던 자신을 너그러운 사랑의 품에 안아주시고 공화국의 영웅으로 내세워주신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은 진정 자신의 친 아버지이고 생명의 은인이라며 감격의 눈물도 흘렸다.
다음으로 그는 평양 여성들이 정말 조선 여성이라며, 남한의 여성들은 미국의 썩고 병든 문화에 물들어 민족의 전통과 여성의 순결함을 잃어가고 있고 돈을 위해 미군의 노리개로 전락되었다며 분개하였다. 또한 자신은 공화국의 품에 안겨 세상에 두 번 다시 태어났다며 미제의 식민지인 암흑의 땅에서 부모 형제자매들을 구원해야 한다며 절절히 호소하였다.
이런 강연을 들으면 모든 군인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정확한 사실은 이런 강연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당 및 청년동맹조직에서는 감상문(강연 소감문)을 써내도록 지시하고 복수의 결의 시간을 갖는다.
‘나는 오늘 강연에서 사회주의 우리나라에 대한 우월성을 긍지 높게 생각했다’,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은 한없는 사랑을 지니신 위대한 분이다’, ‘조선인민의 철천지 원수인 미제의 식민지 남조선을 꼭 해방시켜야겠다는 마음의 맹세를 하였다’ 등의 반응은 모두 서면으로 기록되고 보존된다.
남한 출신의 군사교관을 통한 대적교육의 실효성은 크게 나타난다. 실제로 남한을 체험한 사람을 통해 남조선 사회에 대한 증오는 현실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최성환, 전 인민군 상위>
주민들은 그들의 증언을 들으며 신비해 했고 알게 모르게 그 속에 감춰진 자유와 진실 같은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예를 들면 ‘남조선에서 일자리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말을 들으면 ‘그래도 남조선에서는 개인의 의사에 따라 직업을 구할 수 있는가 보다. 공화국은 모두 노동당에서 배치하는 것뿐인데…’ 하고 추측을 한다.
또한 ‘매일같이 노동자 농민들이 정부를 반대하여 시위를 벌인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와! 신기하다. 공화국에서 노동당과 정부를 비판하는 시위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모두 탱크로 짓뭉겨 버리겠지…’ 하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역설적인 이러한 부작용으로 1990년대부터는 월북한 남조선 군인의 TV 출연이 서서히 없어졌다. 사실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방법이 달라졌다. 이때부터 인민군 각 부대별로 순회하면서 현장에서 특별 강연으로 대체했던 것이다. 그것을 인민무력부 정치국 선전선동부에서 주관했으며 그에 대한 효과는 나름대로 있었다고 본다.
조작된 남한의 현실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주기보다는 혁명의 무장을 들고 전초선에 선 군인들에게 전문적으로 알려주려고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실용적인 교육을 했던 것이고 이는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1990년부터 1999년까지 황해남도 신천군 온천리에 위치한 총참모부 정찰국 소속 60저격여단에서 군사복무를 했던 나는 세 번 정도 남조선 실정계급교양강연(남조선에서 입북한 군인이나 주민들이 연사로 나서는 강연)을 들었다.
모든 내용은 엇비슷한데 그 중 한 개만을 소개한다.
1997년 여름 여단본부 운동장에서 들었는데 참가자는 대략 2,000여 명 정도였다. 대형 스피커가 달린 방송차(일본제 닛산 봉고차)에 올라 한 시간 동안 강의를 했던 당사자는 남조선 전연군단 병장으로 있다가 74년 입북한 사람이었다.
그는 ‘수령님과 장군님의 품’이 그리워 38선의 철조망을 뚫고 용감하게 공화국으로 왔다고 한다. 그는 유년 시절에 먹을 것이 없어 거지생활을 했고, 남동생은 굶주림에 병이 들어 약한 첩 써보지 못하고 죽었고, 여동생은 빚에 외국으로 팔려갔다고 했다.
그는 남조선 군인들은 미제의 졸개들이기에 아무런 군사작전 권한이 없다고 유난히 강조하였다. 계절마다 진행하는 군사작전에서 미군의 명령 하에 온갖 민족적 차별과 인격 모욕을 받으며 군인생활을 한다고 하였다. 장교들의 기합과 구타에 못 이겨 자살자가 끊이지 않는 ‘괴뢰’ 군 부대에 더는 삶의 희망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대학을 다니다가 국군에 강제 징집되어 노예 같은 군인 생활을 했다고 실토하였다. 그는 남조선 인민들은 북녘의 사회주의공화국을 마음의 고향으로, 삶의 등대로 생각하며 자나 깨나 공화국의 품에 안기기를 소원하고 있다며, 본인도 ‘수령님’의 사상과 통일정책을 지지하여 학창 시절부터 북한에 대한 동경으로 자주통일을 위해 싸웠다고 했다.
또한 공화국에 총을 겨누었던 자신을 너그러운 사랑의 품에 안아주시고 공화국의 영웅으로 내세워주신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은 진정 자신의 친 아버지이고 생명의 은인이라며 감격의 눈물도 흘렸다.
다음으로 그는 평양 여성들이 정말 조선 여성이라며, 남한의 여성들은 미국의 썩고 병든 문화에 물들어 민족의 전통과 여성의 순결함을 잃어가고 있고 돈을 위해 미군의 노리개로 전락되었다며 분개하였다. 또한 자신은 공화국의 품에 안겨 세상에 두 번 다시 태어났다며 미제의 식민지인 암흑의 땅에서 부모 형제자매들을 구원해야 한다며 절절히 호소하였다.
이런 강연을 들으면 모든 군인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정확한 사실은 이런 강연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당 및 청년동맹조직에서는 감상문(강연 소감문)을 써내도록 지시하고 복수의 결의 시간을 갖는다.
‘나는 오늘 강연에서 사회주의 우리나라에 대한 우월성을 긍지 높게 생각했다’,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은 한없는 사랑을 지니신 위대한 분이다’, ‘조선인민의 철천지 원수인 미제의 식민지 남조선을 꼭 해방시켜야겠다는 마음의 맹세를 하였다’ 등의 반응은 모두 서면으로 기록되고 보존된다.
남한 출신의 군사교관을 통한 대적교육의 실효성은 크게 나타난다. 실제로 남한을 체험한 사람을 통해 남조선 사회에 대한 증오는 현실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최성환, 전 인민군 상위>
댓글목록0
댓글 포인트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