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투쟁 월간과 계급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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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5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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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해마다 6월 25일부터 7월 27일까지를 ‘반미투쟁월간’으로 제정한다.
이 기간에는 반미적개심 고취의 각종 행사가 진행된다. 여기에는 군인은 물론 사회의 모든 주민들이 참가한다. 이 기간에는 6・25전쟁이 미군의 계획적인 침략전쟁이라는 것과 이 기간에 미군과 ‘남조선괴뢰군’이 공화국 주민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기본으로 전군, 전민에 대한 집중 정신교육을 진행한다. 북한에서는 정신교육을 계급교양이라고 한다.
평양의 김일성 광장을 비롯한 각 도시의 역전광장 혹은 김일성 사상교양 광장(주로 혁명사상연구실 앞의 광장) 등에서 수백 수천 명의 근로자들이 모여 ‘복수결의모임’과 미국과 남조선에 대한 성토대회를 개최한다.
대외적으로는 해외공관, 친북단체 등을 앞세워 기자회견이나 각종 회의 및 성명, 담화를 통해 주한미군 철수 등 국제적 반미, 반한 모략선전을 벌이고 있다. 특히 남한의 민주역량이 이 기간에 벌리는 반미운동을 많이 소개하며 반미는 남과 북, 해외의 조선민족이 벌이는 범민련 운동으로 선전한다.
북한은 정전 이후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결정으로 해마다 6월 25일을 <반제반미투쟁의 날>로 설정하고 대미 적개심을 고취하는 행사를 내부적으로 진행하여 왔다.
그러다가 지난 1970년 7월 국제기구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를 통해 6월 25일부터 7월 27일까지를 <반미공동투쟁월간>으로 설정하고 공식적으로 반미규탄 행사를 전국, 전민, 전군적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다.
군에서는 이 기간에 주로 미국의 세계 제패의 침략적 야망과 ‘6・25조국해방전쟁’ 때 미군이 감행한 살육만행을 보여주는 교육 영상물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황해남도 신천군에 위치한 ‘신천박물관’과 같은 계급교양관과 미군의 강점지역에 대한 견학을 조직하여 미군과‘남조선괴뢰군’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는데 주력한다.
북한군에 있을 때 이런 현장 견학과 영상물을 보고 울기도 하고 미군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웠던 것도 사실이다. 모두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저런 치 떨리는 만행을 할 수 있을까. 정말 인두겁을 쓴 승냥이(늑대)다’는 생각을 하게끔 증빙자료까지 조작하여 너무나 그럴 듯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린 애들에게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고, 톱으로 사람의 머리를 자르고, 소 두 마리에 사람을 묶어 사지를 찢어 죽이는 영상물을 보고 치를 떨지 않는 군인은 없다.
이 기간에는 전쟁피해자들의 부대방문도 대대적으로 진행된다. 미군에게 팔다리를 잃은 사람으로, 수백 명을 생매장하여 죽이는 장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미군의 만행을 단죄하는 사람으로, 모두의 사연은 군인들에게 끓어오르는 적개심을 불러준다.
본인은 지난 1991년부터 2006년까지 강원도 5군단 6사단에서 군사복무를 하였다. 최전방에서 남한의 군인들을 바라보며 15년을 살았다.
전연 군단이다 보니 다른 부대보다 반미, 반한교육을 더 많이 받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반미교육은 강원도 이천군 이하리에 있는 세균탄 피해지역에 대한 견학 때였다.
거기는 미군이 전쟁 때 세균탄을 투하하여 600명의 마을 주민들을 무참히 살육한 곳으로 선전되는 곳이다. 강사로는 세균무기에 피해를 입었다는 두 명의 주민이다.
한 강사는 여성인데, 그는 세균피해로 온몸이 헐어 평생 여자로서 가정을 가질 수 없었고 혈액 속에 상생하는 요충으로 고통을 받는다고 중언하였다. 다른 남자 강사는 하반신 마비를 앓고 있는 노인인데, 미군이 뿌린 세균탄에 의해 하반신 마비가 왔다고 증언했다.
거기에 가면 미군이 떨어뜨린 세균 포탄도 전시해 놓았는데 USB라는 글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강사들은 마을에 200가구에 6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고 미군의 세균탄에 마을 주민 전체가 목숨을 잃었다며 부모형제 모두를 원수에게 잃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였다.
중대 모든 군인들이 눈물을 흘렸다. 현장에서는 미제와 ‘남조선 괴뢰군’을 단죄하는 복수결의모임도 열렸다. 군인들은 저마다 열기띤 목소리로 복수를 다짐했고 기어이 미제를 남조선에서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나도 그때 토론을 했는데, 그때만큼은 진심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치장교가 되어 군인들에 대한 대적교양을 책임지고 진행하면서 대적교양은 그 어떤 진실보다는 군인들의 적개심을 유발하도록 꾸며지고 만들어 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군에는 남조선을 강점한 미군의 만행자료가 많다. 굶주리고 헐벗은 남녘의 어린이를 인체실험용으로 외국에 팔아넘겼다던가, 배고파 산에서 풀을 뜯고 있는 남녘의 어린이를 짐승 잡듯이 총으로 쐈다던가 하는 내용이다.
또 괴뢰군 장교가 미군 병사에게 대들었다고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쏴 죽였다는 만행자료, 그 밖에 탱크로 여자 대학생을 깔아 죽인 사건, 미성년 여학생을 성폭행하고 각을 떠서 유괴했다는 등의 만행자료가 너무나 많다.
2002년도 대대에 남한 군 출신 강사가 왔던 적이 있다. 김종균이라는 사람인데, 남한에서 90년도 왔다고 소개했다. 그는 대대 전체 군인들 앞에서 ‘썩고 병든 자본주의’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였다.
장마철이어서 굴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지던 날이다. 사단에서는 산사태로 도로가 마비되었으니 당분간 대대에서 침식을 시키라는 지시를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대 선전원이었던 나와 함께 한방을 쓰게 되었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침실에 온 그는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술 생각이 나 그러는데, 좀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부대에서 술은 공급하지 않아도 술을 좋아하는 군관들은 집에서 자체로 술을 뽑는 경우가 많았다. 대대 후방참모에게 부탁을 하여 술 4병을 구했다.
그와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취기가 오르자 서로가 간격이 없어졌다. 이런 저런 질문이 오고갔는데, 나는 궁금했던 남한 실상에 대해 물었다. 먼저 전연 지역에 많이 떨어지는 남한의 전단 내용에 대해 물었다. 대부분 내용을 그는 시인하는 편이었다. 나는 또 미군의 만행 자료에 대한 질문을 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폭소를 터뜨리며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다고 잘라 맨다. 술을 먹고 정신은 좀 후리 멍청했지만 그의 증언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리 미군이라고 해도 남한 장교에게 함부로 못한다며 그건 지어낸 거짓이라는 것이다. 더 깊이 얘기 했다가는 내가 다칠 것 같아 대화를 빨리 끝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생각이 많았다. 모든 교육 자료에 대한 신뢰가 안 갔다.
정말 남한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에 진심이 있다는 것일까. 모든 것이 거짓으로만 생각했는데, 남한에서 온 사람이 사실이라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건강이 쇠약해져 전역한 다음 남한으로 오기까지 나는 남한출신과의 대화를 잊을 수 없었다.
그에게 감사한 마음은 있지만 본인도 인정하는 그 좋은 사회를 버리고 왜 북으로 갔을까 하는 의구심도 풀 길은 없다.
<이영길, 전 인민군 대위>
이 기간에는 반미적개심 고취의 각종 행사가 진행된다. 여기에는 군인은 물론 사회의 모든 주민들이 참가한다. 이 기간에는 6・25전쟁이 미군의 계획적인 침략전쟁이라는 것과 이 기간에 미군과 ‘남조선괴뢰군’이 공화국 주민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기본으로 전군, 전민에 대한 집중 정신교육을 진행한다. 북한에서는 정신교육을 계급교양이라고 한다.
평양의 김일성 광장을 비롯한 각 도시의 역전광장 혹은 김일성 사상교양 광장(주로 혁명사상연구실 앞의 광장) 등에서 수백 수천 명의 근로자들이 모여 ‘복수결의모임’과 미국과 남조선에 대한 성토대회를 개최한다.
대외적으로는 해외공관, 친북단체 등을 앞세워 기자회견이나 각종 회의 및 성명, 담화를 통해 주한미군 철수 등 국제적 반미, 반한 모략선전을 벌이고 있다. 특히 남한의 민주역량이 이 기간에 벌리는 반미운동을 많이 소개하며 반미는 남과 북, 해외의 조선민족이 벌이는 범민련 운동으로 선전한다.
북한은 정전 이후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결정으로 해마다 6월 25일을 <반제반미투쟁의 날>로 설정하고 대미 적개심을 고취하는 행사를 내부적으로 진행하여 왔다.
그러다가 지난 1970년 7월 국제기구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를 통해 6월 25일부터 7월 27일까지를 <반미공동투쟁월간>으로 설정하고 공식적으로 반미규탄 행사를 전국, 전민, 전군적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다.
군에서는 이 기간에 주로 미국의 세계 제패의 침략적 야망과 ‘6・25조국해방전쟁’ 때 미군이 감행한 살육만행을 보여주는 교육 영상물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황해남도 신천군에 위치한 ‘신천박물관’과 같은 계급교양관과 미군의 강점지역에 대한 견학을 조직하여 미군과‘남조선괴뢰군’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는데 주력한다.
북한군에 있을 때 이런 현장 견학과 영상물을 보고 울기도 하고 미군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웠던 것도 사실이다. 모두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저런 치 떨리는 만행을 할 수 있을까. 정말 인두겁을 쓴 승냥이(늑대)다’는 생각을 하게끔 증빙자료까지 조작하여 너무나 그럴 듯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린 애들에게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고, 톱으로 사람의 머리를 자르고, 소 두 마리에 사람을 묶어 사지를 찢어 죽이는 영상물을 보고 치를 떨지 않는 군인은 없다.
이 기간에는 전쟁피해자들의 부대방문도 대대적으로 진행된다. 미군에게 팔다리를 잃은 사람으로, 수백 명을 생매장하여 죽이는 장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미군의 만행을 단죄하는 사람으로, 모두의 사연은 군인들에게 끓어오르는 적개심을 불러준다.
본인은 지난 1991년부터 2006년까지 강원도 5군단 6사단에서 군사복무를 하였다. 최전방에서 남한의 군인들을 바라보며 15년을 살았다.
전연 군단이다 보니 다른 부대보다 반미, 반한교육을 더 많이 받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반미교육은 강원도 이천군 이하리에 있는 세균탄 피해지역에 대한 견학 때였다.
거기는 미군이 전쟁 때 세균탄을 투하하여 600명의 마을 주민들을 무참히 살육한 곳으로 선전되는 곳이다. 강사로는 세균무기에 피해를 입었다는 두 명의 주민이다.
한 강사는 여성인데, 그는 세균피해로 온몸이 헐어 평생 여자로서 가정을 가질 수 없었고 혈액 속에 상생하는 요충으로 고통을 받는다고 중언하였다. 다른 남자 강사는 하반신 마비를 앓고 있는 노인인데, 미군이 뿌린 세균탄에 의해 하반신 마비가 왔다고 증언했다.
거기에 가면 미군이 떨어뜨린 세균 포탄도 전시해 놓았는데 USB라는 글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강사들은 마을에 200가구에 6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고 미군의 세균탄에 마을 주민 전체가 목숨을 잃었다며 부모형제 모두를 원수에게 잃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였다.
중대 모든 군인들이 눈물을 흘렸다. 현장에서는 미제와 ‘남조선 괴뢰군’을 단죄하는 복수결의모임도 열렸다. 군인들은 저마다 열기띤 목소리로 복수를 다짐했고 기어이 미제를 남조선에서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나도 그때 토론을 했는데, 그때만큼은 진심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치장교가 되어 군인들에 대한 대적교양을 책임지고 진행하면서 대적교양은 그 어떤 진실보다는 군인들의 적개심을 유발하도록 꾸며지고 만들어 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군에는 남조선을 강점한 미군의 만행자료가 많다. 굶주리고 헐벗은 남녘의 어린이를 인체실험용으로 외국에 팔아넘겼다던가, 배고파 산에서 풀을 뜯고 있는 남녘의 어린이를 짐승 잡듯이 총으로 쐈다던가 하는 내용이다.
또 괴뢰군 장교가 미군 병사에게 대들었다고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쏴 죽였다는 만행자료, 그 밖에 탱크로 여자 대학생을 깔아 죽인 사건, 미성년 여학생을 성폭행하고 각을 떠서 유괴했다는 등의 만행자료가 너무나 많다.
2002년도 대대에 남한 군 출신 강사가 왔던 적이 있다. 김종균이라는 사람인데, 남한에서 90년도 왔다고 소개했다. 그는 대대 전체 군인들 앞에서 ‘썩고 병든 자본주의’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였다.
장마철이어서 굴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지던 날이다. 사단에서는 산사태로 도로가 마비되었으니 당분간 대대에서 침식을 시키라는 지시를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대 선전원이었던 나와 함께 한방을 쓰게 되었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침실에 온 그는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술 생각이 나 그러는데, 좀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부대에서 술은 공급하지 않아도 술을 좋아하는 군관들은 집에서 자체로 술을 뽑는 경우가 많았다. 대대 후방참모에게 부탁을 하여 술 4병을 구했다.
그와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취기가 오르자 서로가 간격이 없어졌다. 이런 저런 질문이 오고갔는데, 나는 궁금했던 남한 실상에 대해 물었다. 먼저 전연 지역에 많이 떨어지는 남한의 전단 내용에 대해 물었다. 대부분 내용을 그는 시인하는 편이었다. 나는 또 미군의 만행 자료에 대한 질문을 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폭소를 터뜨리며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다고 잘라 맨다. 술을 먹고 정신은 좀 후리 멍청했지만 그의 증언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리 미군이라고 해도 남한 장교에게 함부로 못한다며 그건 지어낸 거짓이라는 것이다. 더 깊이 얘기 했다가는 내가 다칠 것 같아 대화를 빨리 끝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생각이 많았다. 모든 교육 자료에 대한 신뢰가 안 갔다.
정말 남한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에 진심이 있다는 것일까. 모든 것이 거짓으로만 생각했는데, 남한에서 온 사람이 사실이라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건강이 쇠약해져 전역한 다음 남한으로 오기까지 나는 남한출신과의 대화를 잊을 수 없었다.
그에게 감사한 마음은 있지만 본인도 인정하는 그 좋은 사회를 버리고 왜 북으로 갔을까 하는 의구심도 풀 길은 없다.
<이영길, 전 인민군 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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