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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전문가논단

'적의 군사기술 우세를 사상정신 우세로 이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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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2 11:15 1,97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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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군사사상과 이론, 전략전술과 원칙들은 대부분 정신 강조의 교육이다.
 
노동당의 4대 군사노선과 김일성이 제시한 5대 훈련방침, 김정일이 내놓은 4대 훈련 원칙은 인민군에서 모든 규정과 교법의 기준이며 전투정치훈련의 기본 내용이다.
 
자위의 국방력을 위한 노동당 4대 군사노선은 전민무장화, 전군간부화, 전군현대화, 전국요새화다. 여기서 군대에 해당되는 전군간부화는 전체 군인을 수령의 혁명사상으로 정신무장 시키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김일성의 5대 훈련방침은 강의한 혁명정신, 기묘하고 영활한 전술, 무쇠 같은 체력, 백발백중의 사격술, 강철 같은 군사규율을 내용으로 한다.
 
김정일의 4대 훈련원칙은 주체성, 정치사상성, 전투성, 과학성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군사노선과 방침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은 강의한 정신력이 전투 승리의 담보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당과 수령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을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 애국주의다. 어떤 시련과 난관이 닥쳐도 수령만 있으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백절불굴의 혁명정신과 신념으로 싸울 때 적의 군사 기술적 우세를 타승(압승)할 수 있다고 교양하고 있다.
 
나는 북한군 3군단 공병부대에서 1994년부터 2003년까지 10년간 군복무 생활을 했다. 부대 위치는 남포시 룡강군 남석리 부근이었다.
 
1990년대 경제난에 따른 모든 시련을 군대에서 겪었다. 군에서는 나와 같은 77년생을 ‘거북띠’(재수띠)라고 불렀다. 이유는 군 입대 연도인 1994년에 김일성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군부에도 식량난과 생활난이 겹쳤다. 군에 입대하는 신입생들에 대한 보급물자도 그때부터 많이 적어졌다.
 
나에게는 두 살 터울인 형이 있다. 형님은 92년에 군에 입대하여 강원도 1군단 쪽에서 복무하였다. 나는 형님을 뒤따라 94년에 군에 입대하였다. 하지만 나는 92년 형님이 군에 입대한 이후로 그를 보지 못했다. 98년도에 영양실조에 걸려 사망했기 때문이다.
 
훗날 부모님을 통해 들었는데, 형님은 남조선에서 풍선에 띄워 보낸‘적지물자’를 먹고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그때는 나도 그것이 진실인 줄 알았다.
 
당시 내가 복무한 3군단 내에서도 영양실조 환자들이 많았다. 나도 영양실조로 2년간 생고생을 했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군에 나가 갖은 고초와 어려움을 극복하며 1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을 어떻게 지탱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의문이 든다.
 
인간은 먹어야만 살 수 있는 물리적 존재임에 틀림없다. 또한 믿고 의지하는 이념과 사상으로 초래되는 정신력을 지닌 사회적인 존재인 것도 사실이다.
 
인간 본연의 능력과 정신력이 배합될 때 인간은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군에서는 물리적 능력보다는 정신력을 강조한다. 굶어죽으면서도 ‘김정일 장군님 만세!’를 부르고 사회주의를 지키자는 노래를 부르도록 인간을 정신적 불구자로 만들어 버린다.
 
내가 복무한 공병대대는 유사시 연합부대의 강 도하를 지원하는 부대다. 또한 부대의 공사 현장에서 토목공사를 비롯한 건축 작업을 맡아 수행했다. 부대에 있는 대부분 장비들은 기계로만 움직일 수 있는 대형장비들이다.
 
하지만 그 육중한 장비는 병사들의 가냘픈 어깨를 원동력으로 움직일 때가 많았다. 식량난과 생활난이 겹치면서 정치부에서는 ‘강의한 혁명정신’에 대한 교양을 많이 했다. 내 기억에는 ‘항일투사’와 ‘6・25 전쟁 참가자’들의 투쟁사를 강연으로 받았던 것으로 안다.
 
풀뿌리를 씹어 삼키고 영하 40도의 만주벌판에서 오직 ‘김일성 장군님’을 모시고 해방된 조국으로 갈 필승의 신념과 정신으로 싸웠다는 얘기와 전쟁 때 군사 기술적으로 우세한 적의 공격에 보급로가 끊기고 팔다리가 부서지고 온몸이 찢어져도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지켜 목숨도 초개같이 바쳐 싸웠다는 얘기들이다.
 
기가 막히다. 분명 항일 때도 아니고 전쟁 때도 아닌데 굶주리며 싸웠다는 선배들 얘기를 그렇게 실감 있게 들을 수 있은 것은 아마도 우리가 그만큼 굶주렸기 때문일 것이다. 굶주린 병사에게 빵 대신 이상한 정신을 심어준 것이다.
 
1996년부터 97년까지 나는 몸이 허약해지면서 ‘영양실조’ 대상이 되어 보양치료를 받았다. 군단에서는 96년 봄에 허약자들이 많아지자 사・여단별로 허약 환자들을 위한 건물을 내어 별도로 관리하도록 지시하였다.
 
음침한 건물 안에는 처음에 60명 수용의 침구류를 넣었다가 허약자들이 증가하면서 150명 수용 능력으로 확장하였다. 또한 허약자 선정 기준도 달라졌다. 군의소(의병소)에서는 처음에는 중대 추천에 의해 등록하였는데 등록 인원이 급증하자 구토와 설사를 하면서 혼자 일어서지 못할 정도의 환자들만 추려서 보양소에 보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나머지 군인들은 군인 가족이 맡아 간호하도록 하였다. 영양실조 판정 인원이 계속 증가하자 상급기관에서는 부모의 동의를 얻어 귀가치료를 보냈다. 사실 나도 집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님이 중병을 앓고 있었고 1군단에 있는 형님도 앓는다는 소리에 엄두도 못 냈다. 보양치료는 말이 치료이지 사실은 내무 규정생활과 훈련을 하지 않는 것이다.
 
보양치료는 정치부와 후방부 소관이었는데 정치부는 녹음기를 가져다 놓고 매일 같이 혁명군가와 녹음강연을 들려줬다. 내가 보양치료를 받던 당시 회복되지 못하고 사망한 군인이 14명인데, 모두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군인들이었다.
 
감동적이라고 할까? 비극적이라고 할까? 그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남긴 수기 내용을 보면 대부분 제국주의의 고립 압살 책동에 대한 저주였고, 쪽잠과 좨기밥(주먹밥)으로 난국을 진두에서 헤쳐나가시는 ‘장군님’에 대한 흠모의 글이다.
 
내 옆에 있던 친구도 사망했는데, 그는 살아있을 때 나와 많은 대화를 했었다. 6개월을 함께 있다 보니 속에 있는 소리까지 하는 사이가 됐다. 북한군에서 속에 있는 소리는 교과서에 없는 말을 한다는 의미다.
 
그는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남한 출신으로 전쟁 때 자식을 업고 인민군을 따라북에 들어왔다고 한다. 할머니는 따라오지 않겠다고 하여 딸자식과 함께 남에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고향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셨는데 후회를 많이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군에 나올 때 노환으로 몹시 앓으셨는데 통일이 되면 꼭 고모부터 찾으라는 당부를 남겼다는 것이다. 그는 남한이 지금 우리보다 훨씬 잘 산다는 얘기도 하면서 통일이 되어 쌀밥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얘기도 했었다.
 
또한 소련이 망하면서 미국이 세계 유일의 군사 강대국이 되었다며 정말 우리가 싸워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진 솔직한 자기 소견도 밝혔었다.
 
하지만 그는 19세라는 꽃다운 청춘을 차디찬 땅 속에서 영원히 잠들어 버렸다. 그가 지녔던 강의한 혁명정신도 굶주림으로 강요된 물리적인 사멸을 막지 못한 것이다.
 
참 지금에 와서 생각을 해보니, 북한 군인들이 너무 불쌍하고 가엽다는 생각이 든다.
 
배불리 먹어 보겠다는 소박한 꿈마저 짓밟히고 죽어야 하는 운명에 무슨 미련이 남아 ‘장군님 만세!’를 부르고 ‘적’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는지 말이다. 가장 용감할 수 있는 군인은 물러설 자리가 없다고 자각한 군인이라고 들었다. 북한군 정신교양 시간에 자주 내는 퀴즈이기도 하다.
 
북한 군인들에게는 정말로 물러설 공간이 없다. 적과 싸워 이겨야만 내가 살고, 모든 굶주림과 고난이 끝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남조선을 강점한 미군이나 경제적으로 발전된 한국군이 북한군에 비해 현대적인 무장장비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북한군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대해 열광하는 것은 전쟁에서 이겨야만 오늘의 지긋지긋한 고난을 종식하고 풍요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리적이나 태생적으로 정신력을 논하는 것에 나는 반대다. 북한 사람들은 원래 정신력이 강하고 생활력이 강하다는 말은 정말 잘못된 발상인 것 같다. 또한 생활환경에 따라 정신력의 차이를 보인다는 것 자체도 정답은 아니다.
 
나는 북한군 복무에서의 실제적 경험으로 인간의 정신력은 교육과 교양의 문제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김일성・김정일 충성학습으로 가득한 정치상학 시간에는 혁명적 수령관 확립과 함께 숭고한 혁명적 동지애를 가질 것을 강요받는다. 김일성이 항일운동 시기에 한없는 혁명적 동지애로 유격대원들을 이끌었다면서 우리는 이런 모범을 적극 따라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혁명적 동지애를 강조한 노래가 ‘동지애의 노래’이다.
 
가사는 <1. 가는 길 험난하다 해도 시련의 고비 넘으리. 불 바람 휘몰아쳐 와도 생사를 같이 하리라. 천금주고 살 수 없는 동지의 한없는 사랑. 다진 맹세 변치말자 한별을 우러러 보네. 2. 돌 우에 피어나는 꽃은 그 정성 피운 것이고. 죽어도 잃지 않을 생은 그 사랑 주신 거라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야할 혁명의 길에. 다진 맹세 변치말자 한별을 우러러 보네>로 되어 있다.
 
이 노래는 1980년대 초 김정일의 지도로 만들어진 다부작 예술영화‘조선의 별’(김일성의 날조된 항일무장투쟁 기록을 그린 혁명영화)에서 나오는 노래다. 여기서 김일성의 청년기의 별명이 ‘한별’(나라의 별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혁명영화’라고 불리는 이 영화는 내가 고등학교 때 나왔는데 단체 관람으로 몇 번이나 보았다. 그리고 TV에서도 계속 재방하고 인민반장이 가가호호 방문하며 이 영화를 볼 것을 강요했다. 나는 군대에 들어와서도 이 노래를 많이 불렀다. 매주 목요일 취침 전 1시간씩 오락모임 시간이 있는데 이 노래는 여기서 꼭 누군가에 의해 한 번 이상은 불린다.
 
군인들이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으나 얼굴을 찡그리거나 야유를 보내는 사람도 없었다. 노래 가사에 김일성의 다른 이름‘한별’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내가 군사 복무를 했던 1990년대는 많은 인민군 군관, 사관, 병사들의 김정일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진심은 아니었고 형식에 그쳤다고 보아진다. 정상적인 식량 배급이 진행되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 사회의 빈부격차가 심하지 않았다. 동서독이 통일되고 소련이 무너지면서 북한은 태풍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정치적 동맹국이고 경제적 지원국이었던 소련이 하루아침에 자본주의를 선포하였고 북한에 무상원조 해주던 모든 지원을 끊어버렸다. 이때부터 북한은 심각한 식량난으로 인해 배급 중단과 아사현상 등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특히 인민군에서는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가 급증하면서 많은 군인들이 영양실조와 허약, 결핵, 간염 등 질병에 걸리고 탈영, 절도, 강도 행위가 급증하는 등 심각한 문제점들이 속출했다. 내가 있던 부대에서만도 수십 명의 탈영자가 생겼다. 배가 고파서생겨난 탈영자들은 대부분 군사재판에 넘겨졌으며 총살되는 경우도 있었다.
 
단지 김정일의 정치가 잘못되어 생겨난 북한의 경제난이다.
 
많은 주민들이 아사되던 1990년대 중후반 사회적으로 군대는 ‘선군정치’ 덕에 굶지 않는다는 인식이 그래도 확산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군부대에서 장령, 군관들의 비리가 늘어나고 범법 행위가 판을 치고 있었다.
 
말로는 일당백의 강철 같은 군사 규율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군인들에 대한 물자 및 식량 공급도 충분히 이뤄지지 못하는 판에 군관들은 어떻게든 자기 가족들을 살리기 위한 온갖 술책을 쓰고 있었다. 상급에서 내려오는 군사 물자들을 노골적으로 갈취하였다.
 
현실이 이러하니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며 화목하게 지내라는 군관과 병사 관계가 제대로 확립될리 만무하며 인민군은 이름그대로 인민의 군대라며 친분 관계가 좋아야 한다는 군민관계도 빚 좋은 개살구마냥 모두 억지와 가짜로 연출되고 있다.
 
배고픈 군인들이 민가를 습격하니 인민들이 군인들을 좋게 볼 리가 없다. 인민군은 제대로 풍족한 것이라고는 단 한 개도 없다.
 
아니 있다. 정치사상교육이다. 이것만은 풍부하다. 1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교육시켜 준다. 모든 것을 이것으로 이겨야한다고 강조한다. 남조선 괴뢰도당도 정신적으로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고 강요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죽은 송장도 웃을 소리다.
 
서민호, 전 인민군 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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