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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전문가논단

군인 선서와 병사 시절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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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2 14:11 1,65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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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입대절차
 
나는 1971년에 태어나 정해진 북한 인생 스케줄대로 2년간의 유치원 교육과 4년 간 소학교 교육, 6년간의 중학교 교육을 마치며 어른이 되었다.
 
북한은 만 17세부터 성인으로 인정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증(남한의 주민등록증)을 받는다. 공민은 누구나 국방의 의무를 지닌다.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에 “조국보위는 공민의 신성한 의무이며 최대의 영예다.
 
공민은 조국을 보위해야 하며 법이 정한데 따라 군대에 복무해야 한다”로 공민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으며 특히 남성들은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하도록 제정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만 14살이 되면 ‘붉은청년근위대’에 입대를 하면서 국방의 실제적인 의무를 수행한다. 군 징집을 위해 각 도와 군, 구역에 설치된 ‘군사동원부’는 ‘붉은청년근위대’ 입대 연령부터 성분과 가정환경에 따른 조사를 거쳐 군복무 입대 대상을 등록한다.
 
우선 군에 입대하려면 1차적으로 본인이 소속된 학교의 청년동맹 조직으로부터 보증을 받아야 한다. 다음은 군 입대 기준에 따른 신체검사에 합격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학교를 졸업하고 군 입대 절차에 따라 군(시)에서 군사동원부의 인솔 하에 도 군사동원부의 초모소(군 입대 심사를 받는 장소)에 집결한다.
 
도 초모소에 집결하면 절차에 따라 2차 신체검사를 받고 합격이 되면 최종담화(면담)를 갖고 군복과 신발 등 피복을 받는다.
 
그 다음은 편성 절차에 따라 북한군의 각 군종, 병종사령부에 편성되는데 자기가 갈 부대가 확정되면 얼마간의 시간을 받아 부모들과 친척, 친우들을 만난다.
 
한창 초모를 시작할 때면 사회적으로 그 분위기가 대단하였다. 후배들로부터 연도환영을 받으며 역전까지 나갈 때면 그때 당시에는 매우 긍지가 높고 자랑스러웠다. 내가 군에 입대한 1990년도에만도 군복무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높았다.
 
지금은 군에 나가는 자식들에게 부모들은 제발 허약(영양실조)에 걸리지 말고 ‘건강졸업증’(부상이나 병을 갖고 오지 말라는 뜻)을 가지고 돌아오라는 것이 당부이지만, 그때에는 군복무를 잘하여 영웅이나 당원의 영예를 지니고 오라는 격식 있는 당부를 하였다.
 
그때 당시 나도 영웅이 되어 고향땅으로 떳떳이 돌아와 부모님에게 안기겠다는 순진한 생각밖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또한 당시 군대에 나가는 것은 남자로 태어나서 가장 긍지 높고 영예로운 일로 간직할 정도로 군 입대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높았다.
 
당시 남자로서는 군복무를 해야만 제대하여 사회에 나와서도 발전할 수 있었고 장가도 떳떳하게 들 수 있었다. 여성들이 일생을 같이할 혼인 대상자를 고르는 첫 번째 기준이 바로 ‘제대군인 당원’일 정도로 군에 대한 인기가 매우 높았다. 사회적으로나 여성들 속에서 ‘제대군인’보다 더 인기 있는 것은 직업군인인 군관이었다.
 
나는 군에 입대를 하면서 군관이 되어 평생토록 직업군인으로 사는 것을 희망했다.
 
나는 1988년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직업군인의 꿈을 가지고 군 간부 양성기지인 2년제 군사전문대에 입학하였다. 군사전문대는 1980년도에 현대전의 요구에 맞게 능력 있는 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김정일의 방침에 따라 설립되었다.
 
전문대에서는 수학, 과학, 외국어를 비롯한 기술기초과목들은 물론 전자공학과 같은 전문기술도 배운다. 또한 전술, 사격, 체육, 대열과 같은 전문군사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군사 강좌를 별도로 설치하고 5명 정도의 전문군사교관들을 두고 있다. 전문대를 졸업하면 준기사 자격을 취득하며 의무적으로 군에 입대한다.
 
나는 2년간의 군사전문대의 교육과정을 졸업하고 1990년 8월에 인민군에 입대하였다. 도 군사동원부에서 부대 배치를 하였는데, 나는 평양방어사령부에 배치되었다.
 
입대생들은 군사동원부에서 공급하는 도중 식사량을 보고 자기가 가는 곳을 대충 짐작한다. 함경북도에서 평양 이남이나 평북도로 가는 군인들은 보통 네 끼에서 다섯 끼의 도중 식사량을 공급한다. 하지만 평양 이북이나 강원도 함경남도, 량강도나 자강도의 배치 군인들은 도중 식사량이 두 끼 정도다.
 
간부 자식들은 집과 가까운 곳에 가도록 뒤 공작(뇌물을 먹여 가급적 자기가 원하는 바를 실현하는 것)을 해놓지만 나와 같은 평민 자식들은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나는 세끼 분의 도중 식사를 공급받고 평양 근방이라는 것을 알았다.
 
호송군관이 우리를 청진 역에서 평양~두만강 행 급행열차를 태울 때 우리는 모두 환성을 질렀다. 평양이 확정적이었던 것이다. 저녁 6시 경에 열차가 출발, 24시간 만에 서평약역에 도착하였다. 역전에 도착하니 사령부 대열부 군관들이 나와 이름을 호명하며 40~50명 정도로 대열을 재편성하였다.
 
같은 고향과 학교에서 온 친구들은 서로 다른 대열로 산산이 흩어졌다. 나는 그때 고향에서 같이 온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제일 서운하였다. 나는 거기서 같은 여단에 편성된 군인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거의 2시간 정도 달렸는데, 도착한 곳은 평양시 외곽 농촌에 위치한 여단 신병훈련소였다.
 
- 계속 -
 
<김영운, 전 인민군 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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