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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전시 체계와 전국 비상동원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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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3 15:07 1,87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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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황해남도 사리원시에 위치한 815훈련소에서 군복무를 하던 시절인 1993년 봄에 준전시를 겪었다.
 
10년간의 복무 기간 동안 준전시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비상동원령은 수도 없이 받았다.
 
북한은 전시와 준전시 비상동원 체계의 동원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북한에서 전시는 모든 생산과 건설, 학업을 중단하고 전당, 전민 전군이 최고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완전무장을 갖추고 전투작전 지대에 진입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준전시 역시 전당, 전군, 전민이 생산과 건설을 중단하지 않고 군령체계에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고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비상동원 체계는 최고사령관의 비준을 받아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노동당 민방위부, 인민보안부 단위로 전신 지시를 하달하여 돌입한다.
 
인민무력부는 최고사령관 명령 관철이나 국방정책 관철을 위하여 현역과 지방군에 명령서를 하달하여 비상동원령을 내린다. 총참모부는 군・병종 사령부와 같은 전투 단위에 전투 비상동원령을 하달하여 실제 싸움을 위한 동원 체계를 관리한다.
 
노동당 민방위부는 로동적위대와 붉은청년근위대, 민방위대에 인민보안부는 조선인민내무군에 한하여 비상동원령을 하달한다. 전군에 대한 전시동원령은 공화국에 대한 적들의 무력도발이 일어날 경우와 혁명 정세의 성숙된 환경과 요구에 따라 주도적인 공격이 필요할 때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준전시는 군에서 전투10(비상소집 1호)에 해당되는 것인데 전체 군인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공격과 방어의 작전지대 경계를 수행하는 것이다.
 
군의 비상동원 체제는 군인들의 경각심을 높이고 전투력을 향상하기 위한 부대 지휘관의 임무에 규정되어 있다. 비상동원 규정을 보면 북한군 소대는 소대장이 월 1차 소대에 대하여, 중대장은 월 1차 중대의 3분의 1 인원에 대하여, 대대장은 분기에 1차 대대의 3분의 1 인원에 대하여 요소별 비상소집 훈련을 진행하게 되어 있다.
 
우선 지휘관은 비상소집 요소별 훈련을 하기에 앞서 비상소집 계획을 세워 자기의 직속상관 비준을 받은 다음 정치지도원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비상동원(비상소집) 훈련은 3가지 부류로 갈라 볼 수 있다. 우선 비상소집 1호(전투-10)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최고사령부 전투준비 검열을 받을 때, 무력부와 총참모부 명령과 지시가 있을 때 발령하며, 비상소집 2호(전투-20)는 상급단위 전투 준비 검열을 받을 때, 일상 훈련과 부대의 전투준비 상태를 검열할 때 진행한다.
 
비상소집 3호(전투-30)는 자연재해로 인하여 부대를 동원하여야 할 필요성이 제기될 때 적용한다.
 
연락 수단으로는 공영방송과 유무선 통신수단을 이용한다. 하지만 정전과 다른 장애로 유무선 통신이 차단되는 경우 최고사령부 연락병의 구두나 암호화된 쪽지, 종, 사이렌, 3방송(유선방송)으로 하달한다.
 
3방송에서 “조선인민군 제525군부대 장병들에게 축하방송이 있겠습니다”라고 한 다음 <유격대행진곡>을 3번 반복하면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전국, 전군에 알리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다.
 
나는 황해북도 봉산군 독정리 815훈련소 자행포 여단 3대대에서 부분대장(조준수)으로 있을 때 준전시에 따른 전투 근무를 겪었다.
 
일상 대대의 전투 근무는 한 개 소대에서 1문의 포가 전투 근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다. 평시 근무 때 포는 실탄을 장전하지 않고 포탄 상자를 열어놓은 상태며 근무성원들은 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화력진지에서 이탈되지 않은 조건에서 근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준전시와 비상소집 1호 때에는 전체 포의 3분의 2에 해당되는 포들이 실탄을 포의 장탄대에 올려놓고 밀기만 하면 쏠 수 있게 준비한 상태에서 모든 포병(조준, 조촉, 장탄, 장진수)들이 자기 위치에서 근무를 유지했다.
 
우리 부대는 1993년 3월 8일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준전시에 돌입하여 비상전투 근무에 진입했다. 인민무력부, 총정치국, 총참모부 간부들이 수시로 부대를 시찰하였고 부대의 모든 장교들도 귀가를 못하고 병사들과 함께 지냈다.
 
모든 포들은 전투정량의 포탄과 예비포탄을 적재하였고 연유도 가득 채웠다. 군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고 닥치게 될 전쟁에 대해 흥분하면서 별의별 상상을 많이 했다.
 
하지만 불안해하거나 겁에 질린 모습은 아니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또 언제인가 한번은 반드시 싸워야 한다는 ‘전쟁관’에 세뇌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상근무에 돌입한지 5일 정도 되었는데 갑자기 기동훈련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드디어 전쟁이 터졌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부대 후방부에서는 전투보급물자를 공급했다.
 
평상시 북한 병사의 일일 급식량은 800그램이 정량이다. 하지만 유사시 전투 식량은 1킬로그램이다. 후방부에서는 물만 부으면 밥이 되는 ‘말린 쌀밥’과 건빵을 공급했고 일주일분의 식량 공급도 1킬로그램 정량으로 공급했다. 게다가 부대기동 시간이 야간이었다. 저녁 8시경에 출발 명령이 떨어졌다.
 
무한궤도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고 여단의 포들이 도로를 메웠다. 봉산군 도로에 나서니 민간인 차는 온데간데없다. 부대는 독정리를 떠나 린산군을 거쳐 평산군 봉천리 계선까지 전진했다. 남쪽으로 정해진 이동 경로를 보면서 군인들은 모두 전쟁이 일어나는 줄로 믿고 있었다.
 
분대에 갓 입대한 함경북도 어랑군 출신의 막내가 있었다. 신병을 마치고 부대에 온지 4개월 정도 되었는데 낭만적이고 엉덩이가 가벼운데다 귀여운 데가 있어서 선배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는 기동하는 전 기간 말이 없었다. 봉천에 도착하여 은폐된 화력진지에 포를 세우고 근무 성원을 제외한 인원은 갱도를 차지했다.
 
갱도에 들어와 보니 막내의 바지가 흠뻑 젖어 있었다. 겁에 질려 오줌을 싼 것이다. 그때부터 그의 별명은 ‘오줌싸개’가 되었다.
 
이동한 화력진지에서 2일간 머물다가 우리는 철수 명령을 받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군인보다는 아쉬워하는 군인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전쟁 열의가 제일 강한 또래는 20대 초반의 병사들이다.
 
하사관들의 경우에는 군복무가 거의 끝나가고 앞날에 대한 포부와 꿈이라는 이성적 판단이 생길 때여서 예를 들면 ‘군복무 끝날 때까지 제발 조용히 가자!’는 식이다. 하지만 군복무 초기에 있는 20대 초반의 군인들은 혈기와 흥분으로 ‘전투영웅’에 대한 꿈만 키울 때다.
 
준전시 비상동원을 제외하고도 많은 비상소집이 있었지만 전쟁을 실감케 하는 경우는 그때가 처음인 것 같았다.
 
1986년에 입대하여 96년에 전역하면서 내 기억으로는 한 해에 수차례의 비상소집 훈련을 했으니까 10년 동안에 한 모두의 회수는 짐작할 수 있다. 전군에 하달되는 비상동원령은 아침에 부대 전체를 모아놓고 부대장이 하달하는 것이 상례이고 부대 자체 내 훈련 일정으로 진행하는 비상소집과 상급 기관의 검열에 따른 비상소집은 야간에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비상소집도 군복무 초반 때에 힘든 것이지 계속 하다보면 요령이 생겨 넘길 만했다. 주기적으로 진행되는 비상소집이라 벌써 때가 올 것 같으면 감이 온다.
 
신병 때는 새로운 병영생활 환경에 적응도 못하고 계속되는 경계 근무와 훈련으로 체력이 소진되어 있는 상태다. 저녁 점검을 하고 잠자리에 들 때에는 오늘 밤은 제발 무사히 넘어가기를 애원하며 눈을 감는다. 밤에 진행되는 비상소집은 ‘폭풍’으로 한다. 지휘관이나 직일관이 병실에 들어와 ‘중대 폭풍!’ 하고 큰 소리로 소리친다.
 
잠자리를 차고 일어나 군복을 입고, 신발을 규정대로 신고 배낭과 침구류, 무기와 장비를 갖추고 1차 집결 장소까지 모이는데 시간은 부대별로 다르지만 보통 5분에서 10분이다.
 
우리 대대는 화력진지(자행포 조명 켜는 시간) 차지를 위한 비상소집은 5분, 갱도차지 훈련은 6분이었다. 비상소집에 대비한 요령은 대대장이 퇴근하지 않을 때, 자기 중대장이 당직을 설 때, 상급기관에서 검열 성원들이 내려와 침식을 함께 할 때, 특히 남북관계가 첨예할 때다.
 
하지만 장교들의 감정 대립으로 비상소집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상관이 부탁하는 것을 무시하였던지 상급기관 검열에 제기되어 상관이 욕을 먹었다든가 할 때에는 비상소집으로 혼쭐을 내준다. 평안북도 출신이었던 우리 중대장은 성격상 문제로 여러 번 구타사건에 연루되어 같은 연령의 장교에 비해 승진이 늦었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불평불만이 많았고 중대가 고스란히 피해를 입었다.
 
1994년 가을경에 중대장과 나이가 같은 동갑내기가 대대장으로 부임되어 왔다. 그때부터 중대장의 기분은 항상 저기압이다. 하루는 중대에 대대장이 내려왔다. 대대장은 중대를 돌아보고, 중대장도 만나고 돌아갔다. 대대장이 왔다 간지 며칠 지난 어느 날 밤, 대대장의 비상소집령이 하달되었다.
 
허둥지둥 일어나 밖에 나가 정렬하고 보니 대대장과 대대지휘관들이 중대를 점검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대장이 보이지 않았다. 승진이 늦춰지면서 밤에 과음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날도 술에 만취해 연락병이 알렸지만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대대장은 중대장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으니 당장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대대에서 내려온 참모와 중대정치지도원이 함께 데리러 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나타난 중대장이 대대장에게 보고를 하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중대의 모든 군인들은 중대장이 결코 무사치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대 비상소집에 중대를 책임진 지휘관이 술에 취해 동원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상급기관에 보고되면 중대장은 그날로 철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며칠이 지나도 중대장에 대한 별다른 처벌이 없었다. 후에 알았는데 중대장은 그날 저녁 대대장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는 것이다. 다음날 정치지도원과 함께 뇌물상납도 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중대장은 대대장의 부탁이라면 무조건 해결해 주었다. 담배나 술은 물론이고 대대장의 사적인 부탁으로 군인들도 동원시켰다. 결국 대대장은 단 한 번의 비상소집 훈련으로 야생말 같은 중대장을 휘어잡았던 것이다.
 
비상소집(비상동원)은 기본 인원 점검을 중점으로 하기 때문에 그 시점에는 모두 외출도 삼가고 행동도 조심한다. 비상동원령이 가장 확실하게 떨어지는 경우는 남한에서 한미연합훈련을 할 때다. 지휘관들도 자체 훈련 일정에 포함된 ‘비상소집’ 훈련을 평상시에는 잘 하지 않다가도 그럴 때는 규정대로 집행한다.
 
815훈련소는 일명 공격군단이면서도 완전 전투 단위여서 비상동원령이 많았다. 전역하여 고향에서 7군단 쪽에 근무한 친구와 군 생활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그가 근무한 후방군단은 내가 복무한 전연군단과는 훈련 일정과 근무 상황이 사뭇 달랐다.
 
<이재우, 전 인민군 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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