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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주적관과 대남 적대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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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8 10:31 1,53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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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두절미하고 북한군의 주적은 ‘미・일 제국주의’와 ‘남조선괴뢰도당’이다. 이밖에도 미국을 추종하는 연합세력, 착취계급과 반동세력을 적으로 규정한다.
 
‘미일제국주의’와 ‘남조선괴뢰도당’의 침략적 본성은 절대로 변할 수 없으며, 적과는 반드시 한 번은 싸워야 한다는 것이 북한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주적관이다.
 
10년간 군복무를 하면서 수령에 대한 충실성 교양 다음으로 많이 하는 것이 대적관 확립을 위한 정신교육이다. 유년 시절부터 너무나 많은 주적 교양을 통해 적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키웠지만 군복무 기간에서 내가 직접 싸워야 할 적이라는 점에서 내심 심도가 깊었던 것 같다.
 
나는 황해북도 평산에 위치한 군단 정치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98년 11월에 2군단 6사단 15연대 산하 박격포대대 1중대 정치지도원(정치 장교)으로 발령받았다.
 
중대 정치지도원의 임무는 중대의 당원들과 청년동맹의 정치조직생활 지도와 함께 정치사상교양이다. 정치상학(정신교육) 강사가 되어 총정치국에서 내려 보낸 요강에 준해 하루에 1~2회 강의를 한다.
 
정치지도원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군인 대상으로 제일 많이 집행한 것은 수령에 대한 충실성교양과 위대성 선전이다. 다음으로 많은 것이 계급교양(대적교양)이다.
 
당시는 전연군단들에 대한 식량공급도 제대로 되지 않고, 대대에는 하루에도 무단 탈영병들이 적게는 10여명, 많게는 30여명이 발생할 때였다.
 
장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교대로 탈영병 접수차 출장을 다니는 형편이었다. 대부분 배가 고파 탈영하는 군인들이었지만 그중에는 남조선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 위해 탈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휘소대에 있던 부분대장 문정철은 토요일 저녁마다 부대를 빠져나가곤 했는데, 그는 부대에서 20여리 떨어진 봉산읍에 친한 집을 정해 놓고 그 집에서 남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았던 것이다.
 
그 때 황해북도 지역에서는 남한 드라마와 영화 테이프를 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유는 남한에서 송출하는 아날로그 TV 지상파가 황해도 지역에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누구나 발각되면 정치범이나 죽음으로까지 몰릴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남한 드라마에 대한 호기심은 강한 중독성을 띠고 군부에까지 강타한 것이다.
 
남한 방송이나 영상물을 본 것에 대해서는 용서와 관용이 없다. 중앙당과 총정치국,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의 지시문과 포고문이 수시로 떨어지고 공개처형과 같은 법적 처벌도 끊이지 않았다. 간부들은 연대적 책임 때문에 덮을 수 있는 것은 덮는 추세로 나갔다.
 
나도 혼자만 아는 사건 몇 개는 보고하지 않았다.
 
사관장(특무상사)을 비롯한 전역을 앞둔 하사관들이 생일파티를 하면서 주민지에 나가 술을 먹고 홍콩 영화를 본 것이 내가 심어 놓은 정보원을 통해 포착됐던 적이 있었다. 이소룡이 나온 액션영화인데, 엄연히 금지된 영상물이다.
 
하지만 문정철의 경우는 달랐다. 주민지에 대한 보안서(경찰서) 순찰에 현장에서 발각된 것이다. 보안서에서는 영상물을 시청하던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여 해당 기관에 통보를 했다. 그는 교화 2년형을 선고받았고, 그 사건으로 나는 여단 당위원회로부터 엄중경고 처벌을 받았다.
 
군부에서 남한에 대한 동경과 환상이 움트기 시작하자 보위사령부와 총정치국에 비상이 걸렸다.
 
이후부터 계급교양 자료의 대부분이 한국을 비방하고 경멸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한국에 대한 당국의 설명에서 핵심은 “미제의 괴뢰정부이고 식민지 국가”라는 점이다. 남조선의 역대 대통령은 모두 사대매국노이며 극악한 민족반역자로 선전된다.
 
그런 이유로 한국의 대통령치고 인민군의 사격 표적으로 저주받지 않은 대통령은 없다.
 
나를 비롯하여 90년도 경제난을 겪은 군부출신들은 남한의 김대중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유는 군대식량 사정을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부에서는 김대중이 보낸 식량으로 선전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장군님’의 선군정치와 위대성에 감복하여 남한에서 갖다 바친 조공처럼 선전했다.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중대에는 일일 급식이 병사 1인당 옥수수 400그램 정도에 염장무가 전부였다. 이렇게 어렵던 식량 사정이 남한에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해결되었다. 하지만 그도 인민군 사격 표적지에서는 제외되지 않았다.
 
사・여단 급 부대에는 종합사격 판정을 받을 수 있는 큰 규모의 사격장이 있다. 그 사격장에는 대형 포스터 판이 있는데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정상들을 인민군 병사가 한 총창(총상)에 맞창이 나게 찌르는 것을 형상한 포스터를 붙인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포스터의 주인공도 바뀐다. 내 생각에는 8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은 미・일・한국 중에서도 미국에 대한 적개심에 중점을 두고 주적관 교육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90년도 경제난을 겪으면서 한국에 대한 환상이 사회적으로 확산되자 타깃을 남한으로 바꾸었다.
 
TV에도 남한 실상을 알리는 프로그램이 자주 등장하였고, 한국의 주민들이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찬양 프로를 통해 대한민국에 대한 동경의 싹을 잘랐다.
 
총정치국에서는 한국에 대한 영상 자료를 자주 내려 보냈는데 모두 한국사회에서 삶의 희망을 잃고 동반자살의 길을 택한 남한 주민들의 비극과 집없이 거리를 방랑하며 떠돌아다니는 노숙자들의 생활상이었다.
 
하지만 이 영상물도 좋은 영향만을 준 것은 아니다. 병사의 눈은 자살과 노숙 그 자체보다는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와 몸집을 살폈던 것이다. 썩고 병든 자본주의 사회치고 도시와 거리는 희한할 정도로 멋졌다. 노숙을 한다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보다도 건강해 보였다.
 
정치장교인 나 자신도 그런 점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 때 서울시 영등포구에서 여대생 2명이 동반자살을 했는데 집을 찾은 기자들 앞에서 울분을 토하는 부모들의 모습을 담았다.
 
그런데 기자들이 찾아간 집의 내부가 영상에 담겼는데 군인들은 여기에서 간부집이라도 저렇게 멋지지는 않겠다는 말을 하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남한에 대한 영상물 교육이 군인대중에게 안 좋게 비치면서 정치부에서는 한국 실상에 대한 영상 작업에 만전을 기했다. 동경을 살 만한 모든 영상은 지웠다. 대부분 정부에 대해 울분을 토하는 영상 녹화만으로 편집했다.
 
대적 의식에 대한 병사대중의 동향을 보면 도시와 지방, 국경지대와 내륙지대별로 큰 차이를 보인다. 정치부에서는 군인들의 정치동향 분석을 위해 개별담화 방식으로 정해진 병사와 담화하도록 되어 있다.
 
남한에 대한 동경은 중국 국경지대 사람들과 평양시를 비롯한 대도시 사람들, 황해도의 일부 사람들 속에서 제일 농후하게 나타난다. 그만큼 남한 정보를 많이 접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지방과 농촌 자녀들의 대적 의식은 순진할 정도로 무지몽매했다. 그들은 노동당에서 주입해 주는 모든 교양 자료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알아도 모르는 척해야 하고 옳은 것도 나쁘다고 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모두가 불타는 적개심을 드러내고 타도를 외쳤다. 그러다보면 또 어느새 좋은 것도 나쁘게 보였고 진실도 가짜처럼 느끼며 맹목적인 대적 의식의 쇠사슬에 묶이는 것이다.
 
<정진, 전 인민군 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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