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당대표자 회의 1년 어떻게 변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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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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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정치부 정보보고]
통일연구원 박형중 선임연구위원은 22일'2010.9.28 당대표자회의 재평가'라는 제목의 현안분석에서 "기존의평가와 달리 당대표자회가 북한에서 새로운 권력연합이 출범하는 자축 기념식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후계자 김정은이 9월 당대표자회의를 전후로 내부통제를 현격히 강화하는 작업에 책임을지고 있다"며 "내부통제 조치 강화는 궁극적으로 김정은을 딜레마에 빠뜨리고,그의 명망 형성에도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분석했다. 다음은 전문임.
*****
2010년 9월 당대표자회의 개최 이후 일 년이 지나갔다. 그동안 이회의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있어 왔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평가와 달리 당대표자회가 북한에서 새로운 권력연합이 출범하는 자축 기념식이었다고 주장한다. 퇴장한 권력연합은 1995년 선군정치이래 북한을 이끌어 오던 (구)군부 중심 세력이었다.
(구)군부 중심 세력은 2005년부터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여, 2010년 6월에 이르러서는 주요 인물이 전면 정치 일선에서 퇴장하게 되었다. 대신 2005년부터 점차로 새로운 권력연합이 진용을 갖추게 된다. 특히 2008년 8월 김정일 뇌경색 이후 단행된 2009년 2월의 여러 조치들로 기존의 권력 균형이 완전히 바뀌었는바, 신진세력이 2010년 6월 29일 9월에 당대표자회를 통해 이를 기정사실화 한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선 먼저 1995년 이후 북한 정치과정에 대한 간략한 회고가 필요하다. 북한 군부를 주도세력으로 하는 선군정치는 1995년에 개시되어, 1998년에 그 체제가 완비되었다.
1998년 전후 김정일은 노동당 총비서에 취임하고 헌법 개정을 통해 국방위원회의 위상을 강화했다. 동시에 1990년 대 말 심화조 사건 등을 빌미로 중앙당 주요 인사들을 숙청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2000년경부터 개혁적 경제정책을 시도하였다. 군부 중심세력 연합의 공고화와 관련하여 특히 2001년 7월에 이제강이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된 것과, 이어 2002년 경 북한군 내부에서 고영희가 ‘위대한 어머님’으로 칭송되기 시작한 것을 주목해야한다.
이는 당시의 군부 중심 권력연합이 후계 문제를 세습으로 일단락 지을 의도로, 나름의 선제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2002년 7월 개혁 조치의 진행으로 군에 비해 노동당의 위상은 더욱 위축되었다.
그러나 군부 중심 세력 연합은 2005년부터 내부 공격에 직면했다. 중앙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이 개혁 정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2004년 숙청되었던 장성택은 2006년 1월 당 중앙위 제1부부장으로 복귀했다. 2007년 4월 박봉주 총리가 해임되었다.
이후 5월부터 비사검열 등을 통해 그간에 나타난 개혁적 현상에 대한 전면적 공격이 단행되었다. 이 와중에 2007년 10월 2차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남북정상회담은 신진세력의 중심인물인 장성택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장성택은 2007년 12월 당 중앙위 부장(행정부)으로 승진했다.
북한은 2008년부터는 반시장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고, 아울러 2007년 말에는 2012년까지 강성대국을 건설할 것을 선포했다. (구)군부 세력연합은 2007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김정은 후계체제의 기획에서도 주도권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드디어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에 (신)군부가 대남정책의 전면에 등장한다.
2008년 8월부터 10월까지 김정일은 뇌경색으로 통치 일선에서 퇴장했다. 그가 정무에 복귀한 이후 2009년 초부터 권력 재편 속도는 더욱 빨라지게 된다. 2009년 1월경부터 김정은을 후계자로전면에 내세우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직후 2009년 2월부터 4월까지 약 2개월에 걸쳐신, 구 군부 사이의 세력 판도를 전면적으로 재조정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신군부 주요 인물들이 이 시기에 약진하게 된다. 2003년 9월부터 평양방어사령관을 역임하고 있던 이영호는 2009년 2월 인민군 총참모장으로 임명되며 상장에서 대장으로 승진했다. 2009년 2월~4월경 노동당의 35실과 작전부가 인민무력부 정찰국에 합병되어 인민무력부 산하에 정찰총국이 설치되었고, 이후 미상의 시기에 상장 김영철이 총국장에 임명되었다. 반면 (구)군부의 핵심인사들은 사실상 퇴진했다.
오극렬을 제외한다면 주요 퇴진인사들 모두 선군정치가 시작된 1995년경부터 중용되었던 인물들이다. 1989년 7월부터 작전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오극렬은 2009년 2월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승진했다. 1995년 10월부터 인민군 총참모장이었던 김영춘은 같은 달 인민무력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비록 이 두 사람이 명목상 더 높은 자리로 승진했지만, 실질적 권한 행사는 포기해야만 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명예롭게 실각했다. 김일철의 경우에는 명예로운 실각의 배려조차 주어지지못했다. 그는 2000년 9월부터 재임해오던 인민무력부장 직위로부터 2009년 2월에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상의 권력재편과정을 통해 북한 군부의 실권이 이영호 총참모장과 김정각 총정치국 제1부국장에게로 전이되었다. 김정각은 2007년 3월에 총정치국 제1부국장에 임명되었는데, 총정치국장인 조명록이 2006년 건강 악화로 2007년부터 업무를 중단해 왔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조명록은 1995년 10월에 총정치국장, 1998년 9월에 국방위 제1부위원장에 임명된 바 있다), 김정각은 이미 2007년부터 총정치국을 실질적으로 지휘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2009년 초의 이러한 변동에 이어, 2010년 전반기에 (구)군부 세력연합에 속하는 나머지 주요 인물들도 권부에서 사라졌다.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이용철이 4월 26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발표되었다. 그는 1994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16년 동안 군사문제를 담당해 왔다.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이자 국방위 위원인 김일철은 ‘동지’ 칭호도 생략된 채 5월 13일 해임되었다.
2001년 7월부터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역임하고 있던 이제강은 6월 2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발표되었다. 건강악화로 이미 2007년부터 무력화되었던 총정치국장이자 국방위 제1부위원장인 조명록 또한 11월 6일 심장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선군시대’를 상징하는 군부의대표적 지도자들의 몰락이었다.
한편 2010년 6월에 이례적으로 최고인민회의가 개최되었고, 이 회의에서 장성택이 국방위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2010년 6월 29일에는 중앙당 정치국 명의로 당대표자회가 9월 상순에 개최될것이 공표되었는데, 발표 시점 자체가 절묘했다.
언급한 데로 2010년 6월 말 경은 우선 구 군부세력의 퇴출이 완료되고, 신진 세력의 핵심축의 하나인 장성택이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된때이다. 즉, 신진 세력이 새로운 권력연합의 출범을 공식적으로 공포하고 그 진용을 정비확충하기 위해서 일종의 기념 및 단합대회로서 당대표자회를 기획한 것으로 판단된다. 원래 9월 상순으로 예정되었던 당대표자회는 연기되어 9월 28일에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김정은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를 차지했다. 또한 그 동안 방치되었던 중앙당의 여러 기구가 정비 복원되고, 내각의 여러 직책은 원로 당료로 충원되었다.
2011년에도 주목할 만한 인물에 대한 숙청이 지속되었다. 류경과 주상성의 숙청이 대표적이다. 류경은 1월경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 접촉과정에서 비밀을 누설한 혐의로 제거되었다. 류경의 숙청은 김정은의 보위부 장악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류경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 인물들까지 숙청되었는데, 그 규모가 매우 크다. 김정은이 보위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충성세력에게 벼슬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주상성의 해임도 김정은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주상성은 2004년 7월에 인민보안상에 임명되었는데, 2011년 3월 16일에 해임되었다. 원래 주상성은 이제강과 이용철에 의해 추천되었다고 한다. 이후 장성택의 세력이 강화되자 장성택과 가까워졌다. 이에 김정은이 장성택을 견제하기 위해 그를 해임시켰을 것으로 판단된다. 주상성 대신에 이명수 국방위 행정국장이 4월 7일에 인민보안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과거 김정일의 현지지도에 가장 빈번하게 동행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다시 말해 김정일의 심복이 인민 보안부장이 된 것이다.
요약하면, 2010년 9월 당대표자회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진용을 갖추고, 이를 대내외에 공표하는자축 행사였다. 퇴장한 세력은 1995년 이래 북한을 이끌어오던 (구)군부 중심의 지배연합세력이었다. 새롭게 등장한 권력 연합은 <김정일 + 김정은 + 장성택과 민간당료 + 신군부>의 네 축으로구성되었다. 각 축마다 일정한 업무분장과 상이한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주요 정책 방향은 <핵 보유 고수 + 외화벌이용 개방 + 대내 반개혁>이다.
2011년 9월 현재 새롭게 형성된 세력 연합은 권력 재편을 성공리에 마쳤고 핵능력을 확장했으며 호전성을 과시했다. 외화벌이용 사업 면에서 광물 수출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다양하게 추진하고 있는 다른 사업에서는 아직 뚜렷한 성과가 없다. 무엇보다도 새롭게 형성된 세력 연합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연합의 <반개혁> 정책이다.
특히 김정은은 9월 당대표자회의를 전후로 내부통제를 현격히 강화하는 작업에 책임을 지고 있다. 내부통제 조치 처방강도는 날로 높아가고 있는데, 그것은 역으로 이러한 조치의 효과가 의심스럽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부통제 조치 강화는 궁극적으로 김정은을 딜레마에 빠뜨리고,그의 명망 형성에도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통일연구원 박형중 선임연구위원은 22일'2010.9.28 당대표자회의 재평가'라는 제목의 현안분석에서 "기존의평가와 달리 당대표자회가 북한에서 새로운 권력연합이 출범하는 자축 기념식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후계자 김정은이 9월 당대표자회의를 전후로 내부통제를 현격히 강화하는 작업에 책임을지고 있다"며 "내부통제 조치 강화는 궁극적으로 김정은을 딜레마에 빠뜨리고,그의 명망 형성에도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분석했다. 다음은 전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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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당대표자회의 개최 이후 일 년이 지나갔다. 그동안 이회의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있어 왔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평가와 달리 당대표자회가 북한에서 새로운 권력연합이 출범하는 자축 기념식이었다고 주장한다. 퇴장한 권력연합은 1995년 선군정치이래 북한을 이끌어 오던 (구)군부 중심 세력이었다.
(구)군부 중심 세력은 2005년부터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여, 2010년 6월에 이르러서는 주요 인물이 전면 정치 일선에서 퇴장하게 되었다. 대신 2005년부터 점차로 새로운 권력연합이 진용을 갖추게 된다. 특히 2008년 8월 김정일 뇌경색 이후 단행된 2009년 2월의 여러 조치들로 기존의 권력 균형이 완전히 바뀌었는바, 신진세력이 2010년 6월 29일 9월에 당대표자회를 통해 이를 기정사실화 한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선 먼저 1995년 이후 북한 정치과정에 대한 간략한 회고가 필요하다. 북한 군부를 주도세력으로 하는 선군정치는 1995년에 개시되어, 1998년에 그 체제가 완비되었다.
1998년 전후 김정일은 노동당 총비서에 취임하고 헌법 개정을 통해 국방위원회의 위상을 강화했다. 동시에 1990년 대 말 심화조 사건 등을 빌미로 중앙당 주요 인사들을 숙청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2000년경부터 개혁적 경제정책을 시도하였다. 군부 중심세력 연합의 공고화와 관련하여 특히 2001년 7월에 이제강이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된 것과, 이어 2002년 경 북한군 내부에서 고영희가 ‘위대한 어머님’으로 칭송되기 시작한 것을 주목해야한다.
이는 당시의 군부 중심 권력연합이 후계 문제를 세습으로 일단락 지을 의도로, 나름의 선제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2002년 7월 개혁 조치의 진행으로 군에 비해 노동당의 위상은 더욱 위축되었다.
그러나 군부 중심 세력 연합은 2005년부터 내부 공격에 직면했다. 중앙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이 개혁 정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2004년 숙청되었던 장성택은 2006년 1월 당 중앙위 제1부부장으로 복귀했다. 2007년 4월 박봉주 총리가 해임되었다.
이후 5월부터 비사검열 등을 통해 그간에 나타난 개혁적 현상에 대한 전면적 공격이 단행되었다. 이 와중에 2007년 10월 2차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남북정상회담은 신진세력의 중심인물인 장성택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장성택은 2007년 12월 당 중앙위 부장(행정부)으로 승진했다.
북한은 2008년부터는 반시장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고, 아울러 2007년 말에는 2012년까지 강성대국을 건설할 것을 선포했다. (구)군부 세력연합은 2007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김정은 후계체제의 기획에서도 주도권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드디어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에 (신)군부가 대남정책의 전면에 등장한다.
2008년 8월부터 10월까지 김정일은 뇌경색으로 통치 일선에서 퇴장했다. 그가 정무에 복귀한 이후 2009년 초부터 권력 재편 속도는 더욱 빨라지게 된다. 2009년 1월경부터 김정은을 후계자로전면에 내세우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직후 2009년 2월부터 4월까지 약 2개월에 걸쳐신, 구 군부 사이의 세력 판도를 전면적으로 재조정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신군부 주요 인물들이 이 시기에 약진하게 된다. 2003년 9월부터 평양방어사령관을 역임하고 있던 이영호는 2009년 2월 인민군 총참모장으로 임명되며 상장에서 대장으로 승진했다. 2009년 2월~4월경 노동당의 35실과 작전부가 인민무력부 정찰국에 합병되어 인민무력부 산하에 정찰총국이 설치되었고, 이후 미상의 시기에 상장 김영철이 총국장에 임명되었다. 반면 (구)군부의 핵심인사들은 사실상 퇴진했다.
오극렬을 제외한다면 주요 퇴진인사들 모두 선군정치가 시작된 1995년경부터 중용되었던 인물들이다. 1989년 7월부터 작전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오극렬은 2009년 2월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승진했다. 1995년 10월부터 인민군 총참모장이었던 김영춘은 같은 달 인민무력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비록 이 두 사람이 명목상 더 높은 자리로 승진했지만, 실질적 권한 행사는 포기해야만 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명예롭게 실각했다. 김일철의 경우에는 명예로운 실각의 배려조차 주어지지못했다. 그는 2000년 9월부터 재임해오던 인민무력부장 직위로부터 2009년 2월에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상의 권력재편과정을 통해 북한 군부의 실권이 이영호 총참모장과 김정각 총정치국 제1부국장에게로 전이되었다. 김정각은 2007년 3월에 총정치국 제1부국장에 임명되었는데, 총정치국장인 조명록이 2006년 건강 악화로 2007년부터 업무를 중단해 왔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조명록은 1995년 10월에 총정치국장, 1998년 9월에 국방위 제1부위원장에 임명된 바 있다), 김정각은 이미 2007년부터 총정치국을 실질적으로 지휘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2009년 초의 이러한 변동에 이어, 2010년 전반기에 (구)군부 세력연합에 속하는 나머지 주요 인물들도 권부에서 사라졌다.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이용철이 4월 26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발표되었다. 그는 1994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16년 동안 군사문제를 담당해 왔다.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이자 국방위 위원인 김일철은 ‘동지’ 칭호도 생략된 채 5월 13일 해임되었다.
2001년 7월부터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역임하고 있던 이제강은 6월 2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발표되었다. 건강악화로 이미 2007년부터 무력화되었던 총정치국장이자 국방위 제1부위원장인 조명록 또한 11월 6일 심장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선군시대’를 상징하는 군부의대표적 지도자들의 몰락이었다.
한편 2010년 6월에 이례적으로 최고인민회의가 개최되었고, 이 회의에서 장성택이 국방위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2010년 6월 29일에는 중앙당 정치국 명의로 당대표자회가 9월 상순에 개최될것이 공표되었는데, 발표 시점 자체가 절묘했다.
언급한 데로 2010년 6월 말 경은 우선 구 군부세력의 퇴출이 완료되고, 신진 세력의 핵심축의 하나인 장성택이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된때이다. 즉, 신진 세력이 새로운 권력연합의 출범을 공식적으로 공포하고 그 진용을 정비확충하기 위해서 일종의 기념 및 단합대회로서 당대표자회를 기획한 것으로 판단된다. 원래 9월 상순으로 예정되었던 당대표자회는 연기되어 9월 28일에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김정은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를 차지했다. 또한 그 동안 방치되었던 중앙당의 여러 기구가 정비 복원되고, 내각의 여러 직책은 원로 당료로 충원되었다.
2011년에도 주목할 만한 인물에 대한 숙청이 지속되었다. 류경과 주상성의 숙청이 대표적이다. 류경은 1월경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 접촉과정에서 비밀을 누설한 혐의로 제거되었다. 류경의 숙청은 김정은의 보위부 장악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류경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 인물들까지 숙청되었는데, 그 규모가 매우 크다. 김정은이 보위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충성세력에게 벼슬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주상성의 해임도 김정은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주상성은 2004년 7월에 인민보안상에 임명되었는데, 2011년 3월 16일에 해임되었다. 원래 주상성은 이제강과 이용철에 의해 추천되었다고 한다. 이후 장성택의 세력이 강화되자 장성택과 가까워졌다. 이에 김정은이 장성택을 견제하기 위해 그를 해임시켰을 것으로 판단된다. 주상성 대신에 이명수 국방위 행정국장이 4월 7일에 인민보안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과거 김정일의 현지지도에 가장 빈번하게 동행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다시 말해 김정일의 심복이 인민 보안부장이 된 것이다.
요약하면, 2010년 9월 당대표자회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진용을 갖추고, 이를 대내외에 공표하는자축 행사였다. 퇴장한 세력은 1995년 이래 북한을 이끌어오던 (구)군부 중심의 지배연합세력이었다. 새롭게 등장한 권력 연합은 <김정일 + 김정은 + 장성택과 민간당료 + 신군부>의 네 축으로구성되었다. 각 축마다 일정한 업무분장과 상이한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주요 정책 방향은 <핵 보유 고수 + 외화벌이용 개방 + 대내 반개혁>이다.
2011년 9월 현재 새롭게 형성된 세력 연합은 권력 재편을 성공리에 마쳤고 핵능력을 확장했으며 호전성을 과시했다. 외화벌이용 사업 면에서 광물 수출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다양하게 추진하고 있는 다른 사업에서는 아직 뚜렷한 성과가 없다. 무엇보다도 새롭게 형성된 세력 연합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연합의 <반개혁> 정책이다.
특히 김정은은 9월 당대표자회의를 전후로 내부통제를 현격히 강화하는 작업에 책임을 지고 있다. 내부통제 조치 처방강도는 날로 높아가고 있는데, 그것은 역으로 이러한 조치의 효과가 의심스럽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부통제 조치 강화는 궁극적으로 김정은을 딜레마에 빠뜨리고,그의 명망 형성에도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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