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눈물이 났을가?

관리자
2012-04-06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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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 월 5 일 어제 저녘 중국대사관앞에서 자유선진당 박선영의원님이 손수 몽둥발이 된 나의 발을 씻어 주시며 그동안 너무많은 고생을 했다고, 이제는 그간에 힘들었던 마음 고생을 다 덜어내고 마음 편하게 살아 가라며 함께 눈물을 흘리시며 많은 위로를 해주셨다.
98년 8월 너무나 어린 사랑하는 두 딸들에게, 3개월간 돈을 벌어 가지고 다시 돌아 온다고, 엄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채 돈을 왕창 가지고 온다는 그 말에 그리도 기뻐하는 두 딸들과 손가락 걸며 약속을 하고 북한을 무사히 탈출 했지만 나는 뜻하지 않게 인신매매에 걸려 자식들과 21세기의 이산자 가족의 생 이별을 하게 되였다.
그렇게 생 이별을 당한 나는 중국에서 공안당국에 쫒고 쫒기우며 8년6개월이라는 기나긴 고생끝에 아는 지인의 소개로 한국으로의 길에 올랐다.
그때 이미 나의 몸 속에는 임신 7 개월의 새 생명이 잘 자라고 있었다.
오로지 나는 그 애를 한국에서 낳아 북한에 두고온 두 딸들에게 못다한 사랑을 대신하여 더 잘 키워보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길을 떠났다.
하지만 한국으로 오는길 역시 그리 만만치 않았다.
3월의 날씨라고는 하나 몽골의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고 나무 한그루 없는 망망 대하의 땅 위에서는 살을 에이는 찬 바람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바람 한점 막막아줄 바위나 ,나무 한그루 없는 그런 눈 바람을 맞으며 5일 간이나 헤메이던 나는 그만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한 탓에 체력이 약해질 때로 약해졌다.
뼈를 깍는듯한 산통의 아픔으로 배를 그러 않고 몸부림쳐 보았지만 무심한 하늘은 그만 그리도 애지 중지 하던 나의 아기를 사방 팔방이 눈 밖에 없는 그런 만주 벌판에서 자연유산 시키고야 말았다..
그 길에서 함께 오던 나의 친구들이 굶어죽고 얼어죽어 싸늘한 시체로 변해 버렸지만 그 누구도 우리를 구원해 주는 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울며 불며 몸부림도 쳐 보았고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살려 달라고 애원도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미 나의 아래 도리는 애기의 자연 유산으로 피가 홍건히 흘러 내려 신고 있는 신발속에 잦아든 피는 고이고 고이다 못하여 뽈처럼 둥근 모양이 되였고 그로 인해 전신 동상을 입고 생사기로에서 헤메이던 나는 그만 생각지 않게도 대한민국의 품에 안겨서야 두번 다시 살아 남을수 있었다.
여러번의 수술을 거쳐 8개의 발 가락을 절단했고 남들처럼 걸을수도 뛸수도 없게 되었지만 목숨이 살아 남았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쉴수 있었고 행복하다고 자부 자칭하며 살아 왔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장애인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
솔직히 그 누구도 몽둥발이 된 나의 발을 그렇게 까지 어루 만져주는 이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다.
바늘로 찌르는듯한 아품이 24시간 계속 됨에 따라 그 아품을 참기 힘들어 고향의 어머니를 부르며 내가 흘린 눈물은 그 얼마였던가?
하지만 어제 저녘 한 나라의 큰 일을 떠메고 나가시는 박선영 국회의원님이 손수 눈물도 함께 흘리시며 고향의 친정 어머님의 따듯한 손길로 나의 발을 어루 만져 주시고 다정히 쓸어주시며 이제는 그만 울어도 된다고, 우리가 여러분들의 아품을 함께 해주겠다며 많은 위로를 하여 주셨다.
어데 한나라의 국회의원이 평범한 백성의 없어진 발가락을 어루만지며 그토록 가슴 아파한 사연이 있었던가?
박선영의원님의 친정어머님과 같은 따듯함에 나도 모르게 그만 참고 참았던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박선영의원님과 같으신 분들이 계시기에 이제는 두려울것도 외로울것도 없다는것을....
자유선진당의 박선영의원님 ! 감사합니다. 그리고 너무너무 고맙고 행복합니다.
98년 8월 너무나 어린 사랑하는 두 딸들에게, 3개월간 돈을 벌어 가지고 다시 돌아 온다고, 엄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채 돈을 왕창 가지고 온다는 그 말에 그리도 기뻐하는 두 딸들과 손가락 걸며 약속을 하고 북한을 무사히 탈출 했지만 나는 뜻하지 않게 인신매매에 걸려 자식들과 21세기의 이산자 가족의 생 이별을 하게 되였다.
그렇게 생 이별을 당한 나는 중국에서 공안당국에 쫒고 쫒기우며 8년6개월이라는 기나긴 고생끝에 아는 지인의 소개로 한국으로의 길에 올랐다.
그때 이미 나의 몸 속에는 임신 7 개월의 새 생명이 잘 자라고 있었다.
오로지 나는 그 애를 한국에서 낳아 북한에 두고온 두 딸들에게 못다한 사랑을 대신하여 더 잘 키워보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길을 떠났다.
하지만 한국으로 오는길 역시 그리 만만치 않았다.
3월의 날씨라고는 하나 몽골의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고 나무 한그루 없는 망망 대하의 땅 위에서는 살을 에이는 찬 바람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바람 한점 막막아줄 바위나 ,나무 한그루 없는 그런 눈 바람을 맞으며 5일 간이나 헤메이던 나는 그만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한 탓에 체력이 약해질 때로 약해졌다.
뼈를 깍는듯한 산통의 아픔으로 배를 그러 않고 몸부림쳐 보았지만 무심한 하늘은 그만 그리도 애지 중지 하던 나의 아기를 사방 팔방이 눈 밖에 없는 그런 만주 벌판에서 자연유산 시키고야 말았다..
그 길에서 함께 오던 나의 친구들이 굶어죽고 얼어죽어 싸늘한 시체로 변해 버렸지만 그 누구도 우리를 구원해 주는 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울며 불며 몸부림도 쳐 보았고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살려 달라고 애원도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미 나의 아래 도리는 애기의 자연 유산으로 피가 홍건히 흘러 내려 신고 있는 신발속에 잦아든 피는 고이고 고이다 못하여 뽈처럼 둥근 모양이 되였고 그로 인해 전신 동상을 입고 생사기로에서 헤메이던 나는 그만 생각지 않게도 대한민국의 품에 안겨서야 두번 다시 살아 남을수 있었다.
여러번의 수술을 거쳐 8개의 발 가락을 절단했고 남들처럼 걸을수도 뛸수도 없게 되었지만 목숨이 살아 남았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쉴수 있었고 행복하다고 자부 자칭하며 살아 왔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장애인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
솔직히 그 누구도 몽둥발이 된 나의 발을 그렇게 까지 어루 만져주는 이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다.
바늘로 찌르는듯한 아품이 24시간 계속 됨에 따라 그 아품을 참기 힘들어 고향의 어머니를 부르며 내가 흘린 눈물은 그 얼마였던가?
하지만 어제 저녘 한 나라의 큰 일을 떠메고 나가시는 박선영 국회의원님이 손수 눈물도 함께 흘리시며 고향의 친정 어머님의 따듯한 손길로 나의 발을 어루 만져 주시고 다정히 쓸어주시며 이제는 그만 울어도 된다고, 우리가 여러분들의 아품을 함께 해주겠다며 많은 위로를 하여 주셨다.
어데 한나라의 국회의원이 평범한 백성의 없어진 발가락을 어루만지며 그토록 가슴 아파한 사연이 있었던가?
박선영의원님의 친정어머님과 같은 따듯함에 나도 모르게 그만 참고 참았던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박선영의원님과 같으신 분들이 계시기에 이제는 두려울것도 외로울것도 없다는것을....
자유선진당의 박선영의원님 ! 감사합니다. 그리고 너무너무 고맙고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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