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 위엔에 팔려 간 삶(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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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험한 한국행
중국에서 한국행으로 가는 길에 잡혀서 북송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잡히면 무조건 총살이라는 말도 들었다. 북한에서 강을 건너다가 걸리면 돈만 있으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을 오다가 잡히면 범위가 넓어진다. 나와 언니는 또 약을 들고 있었다. 잡히면 총살당할 지도 모르니 그 전에 먹고 죽으려고 했다.
청도에서 곤명까지 오는데 3일이나 걸렸다. 나와, 언니, 언니의 어머니까지 3명이 움직였다. 심양에서부터 우리는 북한언니 사촌이 소개시켜준, 얼굴을 본적도 없는 한국인 브로커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다. 브로커는 한국에서 우리와 연락했기에, 나는 우리가 어떻게 되든 이 사람은 절대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중국말도 잘하니까 브로커가 필요 없었다. 신분증만 보여주지 않으면 북한여자로 의심받은 적은 없었다.
중국의 국경을 넘을 때가 가장 위험했다. 잡히면 총살이다. 그때 나는 너무 신경을 많이 써서 감기에 걸려 몸이 아팠다. 아프니까 사람이 보이지도 않고 귀도 안 들렸다.
곤명에 도착하자 브로커를 통해서 모여진 16명의 북한사람이 있었다. 모두 힘들게 산을 넘고 이제 태국으로 가는 강 하나만 건너면 되었다. 이 중에는 4살, 6살 되는 아이들도 두 명 있었다. 북한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업고 산을 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차 소리가 들렸고, 혼비백산한 사람들은 살겠다고 모든 짐을 내팽개치고 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도 몸이 아픈 상태에서 뛰다가 넘어졌는데 언니가 다시 돌아와서 나를 일으켜 세워줬다. 알고 봤더니 하지만 사실 그 차량은 우리를 강까지 데려다 주러 온 차였던 것이다. 라오스에서 강을 건널 때는 보트도 아닌 나무 쪽배를 타고 건넜다.
태국에 도착해 우리는 9일 동안 메사이 감옥 있었다. 이곳에서는 하루에 알량미 밥을 두 끼씩밖에 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일찍 내보냈다는데 우리 16명은 생각보다 오래 붙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메사이에서 치앙라이로 옮겨져 8일 동안 있은 후 방콕에서 2달 정도 있었다.
나는 방콕 수용소에서 국정원 사람들과 면담할 때 북한사람이 아니라는 오해를 받았다. 중국에 오래 있다 보니 조선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고 북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니, 김정일에 대해서나 북한가곡을 하나도 몰랐다. 오로지 아버지 직장만 알았고 그 누구도 내가 북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한국 행이 1주일동안 연기되었다. 국정원 사람들은 내게 북한사람이라고 거짓말한 댓가로 방콕에서 2년 감옥으로 갈 수 있다고 겁을 주기도 했다. 다행히 아버지 직장 분이 그곳에 있어서 516 건설사업소와 아버지를 확인해서 2011년 2월 한국으로 올 수 있게 되었다.
일분일초가 행복하다
2011년 4월 29일, 하나원 청소년 반에 배정되어 처음으로 교복을 입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나도 당당하게 교복이라는 것을 입어 보구나하고 감격했다. 요즘은 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 학원을 다닌다. 수업을 듣다가 쉬는 시간에 창문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한다. 중국 하늘을 올려다 볼 때는 내가 과연 한국을 갈 수 있을까, 언제갈 수 있을까라고 올려다봤었다.
하지만 요즘은 부모님 생각이 나 혼자 행복한 것이 죄스럽다. 어머니가 내가 다른 아이들과 학교를 다니고 선생님과 함께 내 소개도 한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또 자원봉사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돕기도 하는, 이런 대견한 내 모습을 보면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할까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 전까지는 정신없어서 이런 생각 못했는데 이제 지나온 일 생각하면 감격스럽기도, 죄스럽기도 하다.
한국에 와서 죽고 싶다는 생각은 단 1분 1초도 해본 적이 없다. 북한과 중국에 있을 때는 죽고 싶은 마음이 너무 많았다. 특히 중국에 있을 때는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서러웠다. 지금은 너무 감사하고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만 착하게 살면 내 주변은 착한 사람으로 채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인생의 목표는 첫째는 착하게 사는 것이고, 둘째는 열심히 사는 것이다. 여기서는 내가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하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북한 아이들은 삶에 대한 의지는 많은데 힘들게 노력한 것만큼 대가를 못 받아 억울한 것이 많다. 내가 가장 슬프게 생각하는 것은 북한 아이들은 배움의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혜산에는 강을 넘어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다. 내 동생도 한국을 오고 싶어 한다. 동생은 노래도 잘하고 똑똑해서 공부도 잘 할 것이다. 꼭 데려오고 싶다.
중국의 시골에 살고 있는 북한 사람들도 한국을 오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가다가 잡히는 게 두려워서 움직이지 못한다. 중국은 김정일과 가까우니까 북한사람들을 잡으면 북한으로 보내는데 한국으로 보내게끔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최영림(가명)
[1992년생 양강도 혜산 출신 2009년 탈북, 2011년 한국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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