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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위엔에 팔려 간 삶(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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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자살을 시도하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는 마음으로 약 한 움큼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때 마침 감기에 걸려서 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약을 먹고 한 20분 정도 지나자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쓰러졌다. 할머니가 달려와서 나를 깨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는 놀라서 고모를 불렀고, 곧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위세척을 시켰다.


 

병원에 입원한 지 이틀째 되자 아들은 내게 미안한지 말을 걸었다.

“동생아 왜 그러냐. 오빠가 그렇게 나쁜 놈인가?

“제발 이 집에서 내보내주세요.” 나는 이틀 동안 굶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을 일으켜 무릎 꿇고 빌었다.

“보내주면 어디 가겠나?

“한국을 가겠어요.” 이 말을 듣고 아들은 코웃음을 쳤다.

“너 생각이 야무지구나. 한국가면 누가 너를 받아주겠는가? 너의 부모님이 한국에서 너를 받아주겠는가?

“보내만 준다면 한국을 갈 수 있어요.

“놀고 있군. 사람들이 다 너를 놀리는 것이다. 갈 수 있으면 한번 가봐라. 여기서 서너 발자국만 걸어도 경찰이 와서 너를 잡아간다.

“여기 더 있다가는 말라 죽겠어요. 제발 나를 보내주세요”

“누가 너를 말라 죽이냐? 우리가 너를 못살게 구냐? 우리 집에서 너 먹고 싶은 거 다 해주고, 입고 싶은 거 다해주는데.

“당신네 집에서 생활했던 돈은 갚을 테니 제발 나를 보내주세요,” 나는 애원했다. “네가 여기서 중국인으로 인정받는다면 일할 수도 돈도 벌 수도 있겠지만 너는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말라 죽어도 여기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는 여기서 신분도 없고 죽어도 너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어.


 

그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까 내 목숨은 짐승의 것보다 못했다. 내가 죽어 시체를 쓰레기장에 갔다 버려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말이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나는 슬픔에 못 이겨 또 자살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동맥을 끊었다. 약을 먹을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동맥 끊을 때는 머리 중간에서부터 바늘로 찌르면서 내려오는 기분이었다. 몸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심했다.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북에서 나를 힘들게 키워놓았는데 나는 비참하게 죽는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죄송했다.


 

손목에서 피가 흘렀고 고통스러워서 옆에 있던 의자를 쥐어뜯고 뒹굴었다. 그러자 그 집 아이가 보고 “아지미가 피로 장난한다”며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는 달려와서 나를 치료했고 덩달아 고모도 말렸다. 고모는 “도망치더라도 조금이라도 몸이 건강해져야 도망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달랬는데 생각해보면 그 말 한마디가 참 고마웠다. 그때는 너무 소박하게도 이 말 한마디가 힘이 되었다.


 


옥수수가 익어가는 계절, 다시 도망치다


 

두 번의 자살시도 끝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강냉이가 익을 때 도망가리라 다짐했다. 석 달 후 마침내 강냉이가 사람 키만큼 자랐다. 2010 7 29일은 보름달이 떴고 비가 왔다. 주의를 살피다 밤 11시 반에 담장을 몰래 넘었다


 

이번 잡히면 맞아죽을 수도 있으니, 북에서 강을 넘었을 때보다 더 큰 각오로 임했다. 동맥도 끊어 보았으니 지니고 있는 칼로 내 목이라도 못 찌를까. 한번 해보니 무서울 것도 없었고 죽자고 마음먹었는데 못 할게 없었다.


 

한족 집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9미터나 되는 담장을 넘어야했다. 담장을 바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야외에 위치한 화장실을 타고 올라가야했다. 화장실은 변소에 뚜껑이 없는 푸세식이라 발을 잘못 디디면 빠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할 수없이 신발을 벗어 던지고 화장실 담장을 맨발로 올라갔다. 담장에 올라서서 강냉이 밭이 있는 밑을 내려다보니 내가 뛰기엔 너무 높다. 하지만 눈을 딱 감고 뛰어내리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강냉이가 한참 익을 때라 얼굴이 긁히고 상처가 낫지만 일어나서 정신없이 한참을 뛰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집주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족 집에서 시내로 가려면 차로 2시간 거리였기 때문에 걸어서는 한참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내에 나가려면 버스라도 타야 갈 수 있다.


 

나는 강냉이 밭에 숨어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그날따라 비가 왔는데 어찌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 당시는 강냉이 밭에서 김매는 시절이니까 날이 화창했다면 밭일 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발각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냉이 밭에 숨어 있으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보인다. 바깥을 주시하고 있는데 어느 남자가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동안 도망치기 위해 도와달라는 중국어만 골라서 공부했었다. 중국은 56개 민족이 있으니까 사투리도 많다. 그래서 그 남자에게 “나는 중국 사람인데 다른 먼 지역에서 돈 벌러 와서 이 지역 남자와 결혼했다. 하지만 남편이 나를 때려서 도망 나왔다. 친구한테 전화를 할 수 있게 전화기를 빌려달라”고 했다. 내가 중국말을 잘 하니까 그는 내가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내가 신발도 못 신고 도망 나온 것을 보고 안쓰러웠는지 “메이자 얼마나 불쌍한가. 어디까지 가나? 내가 데려다 줄까” 라고 했는데 나는 그것까지는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 돈 백원과 지니고 있던 전화기도 원래 바꾸려던 거였다며 내게 선뜻 주었다.


 


강제혼인을 피해 달아나다


 

북한여자들은 중국집에서 도망쳐 나와 의지된다고 조선 사람을 많이 찾아간다. 하지만 한 민족이라 찾아갔다가 다시 팔려가는 경우가 많고 이 사실은 가슴이 아프다.

나 또한 그럴 뻔했다. 나도 한족 집에서 도망쳐 나와 어느 조선여자를 찾아갔다. 이 조선여자는 중국인에게 시집와서 아이를 낳고 살고 있었다. 중국인 시댁에는 미혼인 첫째 아들과 이미 혼인한 둘째가 있었다. 처음에 이 조선여자는 딸 같은 내가 오니까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며 잘 대해줬다. 시아버지도 내가 중국말을 잘하니까 좋아했고 며느리를 삼겠다고 며칠 동안 설득했다. 하지만 나는 한국으로 가겠다는 확고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사실 시골에서 중국여자와 결혼하려면 많은 돈을 내고 사야 하기 때문에 나는 그 집에 굴러들어온 호박이었다. 또 동네에서 북한여자가 결혼하면 잘한다더라 하는 인식 때문에 나를 쉽게 받아들였다. 이 시아버지는 설득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중에는 아들과 결혼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해 북한으로 보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 조선여자도 다른 집으로 시집보내겠다고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여자도 나를 팔려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결국 시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이 집 며느리를 하겠다고 했다. 아들과는 얼굴은 한 번도 못보고 전화연결 해보았다. 오로지 그가 시내 큰 공장에서 물품 생산하는 일을 한다고 전해 들었을 뿐이다. 나는 한국을 당장 못가더라도 살다가라도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그렇다면 이집에 잠시 있는 동안이라도 이 가족을 실망시키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 한족 가족은 나를 돈을 주고 사오지 않은 탓에 자유롭게 내보내 주었다. 이집에서 나의 명칭은 며느리였고 가족들도 ‘네 방’이다, ‘네 집’이다라고 말해주니 마음이 편했다. 시아버지도 나를 중국여자 못지않게 대해 주었고 남편 될 남자도 내가 중국말을 잘하니까 한 달 동안 매일 전화했다. 심지어 나에게 만원까지 줬다. 내가 그 사람에게 나는 “중국여자를 아내로 들이려면 적어도 20만원씩 드는데 당신은 돈이 안 들지 않나. 내 어머니가 힘들게 북한에 있으니까 북한에다가 돈을 부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돈 만원을 북한으로 송금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아버지의 사촌가족(시아버지 사촌동생)이 모였다. 그런데 사촌가족의 며느리도 북한 여자였던 것이다. 북한에서 온 언니 은희(가명)를 만나서 기뻤고, 22살 언니는 키 1m 70cm에 너무 예뻤고, 당시에 중국인 남편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반가워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언니의 사촌이 한국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한국에 있는 사촌과 연결을 시켜달라고 했고 결국 이 언니와 함께 둘이서 시골에서 도망쳤다.


 

최영림(가명)

[1992년생 양강도 혜산 출신 2009년 탈북, 2011년 한국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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