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무기들 ⑮ - 지상전의 왕자(王者)들

본문
20세기 초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은 인류 전쟁사(史)의 재앙을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이 전쟁에서 유럽 각 국은 궁·포병 원거리 공격 -> 기병대 돌격 -> 보병 접전으로 이어지는 기존의 전쟁 패턴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갖가지 신무기를 선보였다. 그 중 19세기 말 발명가인 하이람 맥심(Hiram S. Maxim)이 개발한 '맥심 기관총'과 독일의 화학자인 프리츠 하버(Fritz Haber)가 만든 화학무기는 단연 재앙 중의 재앙이었다.
27.2kg 무게의 맥심 기관총은 탄약 장전 후 한 번의 방아쇠 당김으로 연속적인 사격이 가능토록 제작된 최초의 기관총이었다(그 전에 같은 개념의 '개틀링포'가 발명되긴 했지만 성능면에서 맥심 기관총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이 기관총은 불과 5~6명의 인력으로 수백~수천 명을 몰살시킬 수 있는 최고의 '살인기계'였다. 1893년 짐바브웨 폭동 사건에서 영국은 4정의 맥심 기관총을 동원해 원주민 4천여 명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1905년 러일(露日) 전쟁 당시 러시아는 1정의 맥심 기관총으로 일본군 1개 대대를 전멸시켰다.
1차 세계대전에서도 성능을 유감없이 발휘해 독일은 10만 정의 맥심 기관총으로 돌격하는 적 기병·보병을 흔적도 없이 모조리 사살했다. 화학무기도 살상력에서는 마찬가지여서 1차 세계대전 내내 수 많은 군인들을 끔찍하게 도륙했다. 이 전쟁에서 약 850만 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 중 대부분이 기관총과 화학무기에 의해 희생되었다.
기관총은 21세기 오늘 날까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여전히 보병 전력의 핵심 병기로 자리 잡고 있다. 한반도에서 대표적인 것이 우리 육군의 경기관총인 K-3와 고속유탄기관총 K-4, 대구경 중기관총인 K-6다. 북한군도 분대 지원화기인 '82식 기관총' 등을 운용 중에 있다.
화학무기는 1997년 국제사회가 조인한 화학무기금지조약(CWC)에 따라 현재 사용이 금지된 무기이지만 북한과 시리아 등은 아직 이 조약 가입을 거부하고 있다. 국방부가 국회 국방위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 정권은 20여종의 화학무기를 약 5천t 가량 보유 중이다. 이는 한반도 인구 전체를 몰살시키고도 남는 양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맥심 기관총의 경량형인 비커스(Vickers) 기관총을 난사 중인 영국군 병사들. 화학무기 공격에 대비해 방독면을 착용하고 있다>

<장갑차에 설치된 K-6 중기관총>
기관총과 화학무기는 또 다른 무기가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바로 탱크(tank)다.
기관총과 화학무기 공격을 피해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각 국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참호를 파고 그 안에 병력을 숨겨 적국과 대치하는 '참호전'을 펼쳤는데, 행여 참호에서 나와 적군을 향해 돌격이라도 할라치면 어김 없이 기관총 앞에 몰살당하고 말았다.
참호 속에 숨어있다 하더라도 화학무기가 실린 포탄이 날아들 경우 치명적인 전력 손실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타개할 방안은 오직 적군에 대한 '돌격'과 '궤멸'뿐이었다.
지금까지도 영국의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당시 해군장관은 해군 소속이라는 점이 어울리지 않게 적군의 기관총 세례를 뚫고 적진으로 돌격할 전투 장갑차량, 즉 탱크의 실전 배치를 승인했으며 프랑스에 첫 투입시켰다(처질은 사실 육군 장교 출신이지만 정치적 배경이 없어 해군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무게 28t의 거구를 앞세워 모든 총알을 튕겨내면서 돌진하는 이 '움직이는 쇳덩어리' 앞에 기관총을 쥔 병사들은 경악했으며, 반대로 탱크에 탑승한 병사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모처럼의 리벤지(revenge. 복수)를 즐겼다. 혹자는 탱크의 기관총에 맞아, 혹자는 탱크의 육중한 무게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이 신형 무기의 앞을 가로막을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탱크도 기관총 등과 마찬가지로 오늘 날 중요한 지상전 전력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리 육군은 세계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XK-2 '흑표(黑豹)'의 실전 배치를 앞두고 있으며, 북한군은 신형 탱크인 '폭풍호'를 운용 중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서 생산된 최초의 탱크. 대구경 주포(主砲)와 같은 중화기는 없지만 무한궤도형 바퀴 등 오늘 날의 탱크에도 채용되고 있는 기술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북한군의 신형 탱크 '폭풍호'. 소련제 T-62를 개량한 모델이다. 중량은 44t, 최대 속도는 시속 60km, 항속거리는 370km이며 주(主)무장은 125mm 또는 115mm 신형 주포, 부(附)무기는 14.5mm KPV 대공(對空)기관총, 사격통제시스템은 레이저 거리 측정기와 적외선 탐조등 등을 갖추고 있다. 우리 육군의 XK-2 흑표는 중량 55t, 최대 속도는 시속 70km, 항속거리는 450~500km이며 주무장은 120mm 활강포, 부무장은 12.7mm K-6 중기관총, 사경통제시스템은 자동 피아(彼我)식별장치·자동항법장치·표적 탐지 및 추적 장치·전장 정보 관리체계(BMS) 등을 갖추고 있다>
탱크는 다시 또 다른 무기를 탄생시켰다. 대전차 로켓이다.
탱크가 거의 무적(無敵)의 병기로 전장을 종횡무진하게 되자 세계 각 국은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물론 탱크 대 탱크 간의 교전이라는 방안이 있기는 했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엄청난 손실이 뒤따랐다. 막대한 국가예산을 들여 생산한 탱크들이 일순간에 고철로 변하는 것은 물론 행여 아군 탱크가 전멸할 경우 그대로 전선이 돌파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자주포와 같은 장사정포나 중대 지원화기인 박격포 마저 계속해서 이동하는 탱크를 상대로 효과적인 공격을 펼치지 못했다. 애초부터 자주포와 박격포는 보병을 상대로 개발된 무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에 독일·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게 된 미국은 보병에 초점을 맞췄다. 보병의 가장 큰 장점은 탁월한 엄폐 능력에 따른 전장에서의 신속한 기동이었다. 탱크는 사방이 장갑으로 둘러싸인 특성상 탑승자의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었으며, 바위나 풀 등 도처의 엄폐물을 이용해 모습을 숨기며 신속하게 사방에서 접근하는 보병을 모두 잡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탱크도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주변에 보병을 호위 병력으로 늘 대동하고 다녔지만 이 호위 병력이 격파당할 경우 그대로 적 보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미 국방부는 이 점을 간파하고 벨(Bell) 연구소의 엔지니어인 클래런스 힉맨(Clarence Hickman) 박사의 도움을 얻어 최초의 대전차 로켓 발사기, M1(일명 바주카포)을 개발했다.
2명의 보병이 운용하는 M1의 위력은 엄청났다. '사막의 여우'라는 별칭을 가진 독일 육군원수 에르빈 롬멜(Erwin Rommel)이 지휘하는 당시 세계 최강의 기갑부대를 상대로 1942년 북(北)아프리카에서 첫 선을 보인 이 무기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탱크 특유의 높은 화력과 방어력, 그리고 속력을 바탕으로 하는 '전격전(blitzkrieg)'의 달인이었던 롬멜은 크게 당황했다. M1으로 무장한 채 매복 중인 적 보병에게 요란한 엔진음과 함께 커다란 덩치로 질주하는 탱크는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했으며, 당연히 전격전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신속한 진격이 불가능하게 됨에 따라 그때까지 궁지에 몰리던 미영(美英) 연합군은 비로소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않아 독일도 대전차 로켓 개발에 성공했다. 1943년 초 미군으로부터 탈취한 M1을 토대로 매커니즘을 분석한 독일 엔지니어들은 곧바로 이를 모방해 더 큰 사정거리와 더 큰 탄두를 장착한 대전차 로켓 발사기를 만들어냈다. 이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은 다시 2년 간의 긴 시간 동안 교착상태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아파치(Apache) 공격 헬기 등 다양한 대전차 공격 수단이 발달한 오늘 날에도 보병용 대전차 로켓은 여전히 입지를 굳히고 있다. 한반도에서 대표적인 것이 미 육군이 운용 중인 FGM-148 재블린(javelin) 대전차 미사일이다.
이 무기는 현대의 기관총과 탱크가 근본적으로 70~100년 전의 원형(原形)의 기술을 거의 그대로 채용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보다 획기적으로 진화했다. 탄도 미사일의 기술이 적용된 것이다. 기존의 M1과 같은 대전차 로켓은 지상과 수평으로 발사되기에 사정거리나 파괴력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재블린은 이를 극복해냈다.
재블린의 발사 과정은 독특하다. 내부에 장착된 미사일은 별다른 연료 연소 없이 마치 '튕겨져나가듯' 발사기에서 지상과 수평으로 발사된다. 그리고 이후에야 미사일 엔진이 점화되어 별안간 높은 하늘로 치솟아 오른 뒤 다시 탱크 위로 내리꽂히는 방식이다.
이로 인해 보병은 탱크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먼 거리에서 공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으며, 탄도미사일 특유의 파괴력으로 인해 아무리 단단한 장갑으로 둘러싸인 탱크라도 일순간에 파괴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재블린의 공격을 완벽하게 방어할 수 있는 탱크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다.

<재블린을 발사 중인 미 육군 병사. 미사일은 사진과 같은 형태로 장약(裝藥) 없이 발사된 뒤 자체 연소로 하늘로 치솟았다가 목표물을 향해 내리꽂힌다>
지상전은 전쟁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행위일뿐만 아니라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역할을 한다. 아무리 하늘과 해상(海上)·해저(海低)에서 각종 첨단무기를 사용해 적진을 초토화시킨다 하더라도 지상군이 적진 또는 적국 영토에 승리의 깃발을 꽂지 않는 이상 전쟁의 목적은 달성될 수 없으며 끝날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날에도 세계 각 국은 끊임없이 지상전에서 활용될 무기를 개발하고 있으며, 육군을 3군(육해공군)의 중심으로 육성시키고 있다. 오늘 '한반도의 무기들'에서 살펴보았듯 서울에 붉은 인공기를 꽂으려 하는 김정은 정권과 이러한 음모를 분쇄하고 평양에 자유의 깃발을 휘날리게 하려 하는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대한민국의 지상 전력은 북한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다. 정면 충돌 시 혈맹(血盟)인 미국의 군사력을 포함한(조만간 전시작전권이 한미(韓美) 연합사령부에서 우리 군(軍)으로 이관될 예정이다) 우리 육군의 전력은 북한군 전력을 초토화시키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핵무기, 화학무기, 장병들의 정신무장 수준을 예외로 했을 때의 이야기다. 특히 정신무장(spiritual armament)의 필요성은 절실하다.
북한군 장병들은 10년 안팎의 군 복무 기간 동안 매일같이 정치상학(政治上學)과 같은 고도의 세뇌교육을 받음으로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소위 '수령에 대한 결사옹위' 정신으로 충만해진다. 김정은이 빗발치는 총탄 앞으로 돌격하라고 명령하면 돌격하는 것이 그들이다.
반면 우리의 경우는 비교적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당장 예비군 훈련장만 가봐도 그렇다. 전역한 지 1년도 안 된 예비군이 "우리는 미국의 식민지"라는 북한 정권의 주장을 거리낌없이 되뇐다. 물론 자원입대자 등 확고한 애국심과 북한 독재집단에 대한 타도 의지로 무장한 사람들도 있지만 적지 않은 수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무기 면에서 우세하다 해도 그 무기를 운용하는 장병들의 정신무장이 빈약하다면 남는 것은 패배 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월남전이다. 호치민(Ho Chi Minh)이 이끄는 공산주의 월맹에 비해 월등한 군사력을 보유한 월남이었지만 각종 반전(反戰)·평화사상 등 나약한 정신력으로 인해 결국 패망했다. 호치민은 그 틈을 노려 평화협정을 깨고 사이공(Saigon)으로 진격했으며, 월남은 오늘날 지도상에서 영원히 지워지고 말았다.
역사는 말한다. "가장 강력한 지상전의 왕자(王者)는 다름 아닌 정신(Spirit)"이라고. 각종 첨단 지상무기 개발과 발맞춰 우리 군(軍)도 이제는 정신 전력을 한 층 강화해야 되지 않을까.
[겨레얼통일연대 사무국]
댓글목록2
iZmUpWGBT님의 댓글
MbTYwK님의 댓글
댓글 포인트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