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전술가들 ② - 제갈량(諸葛亮)

본문
서기 220년, 장장 4백년의 역사를 이어온 한(漢)제국이 멸망했다.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기업을 연 이래 무제(武帝)의 북방 정벌과 서역 무역로(Silk Road) 개척, 광무제(光武帝)의 후한(後漢) 건설 등 숱한 전설을 남기며 중국인들의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졌던 한제국은 위문제(魏文帝) 조비(曹丕)가 황위를 찬탈함으로서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중원(中原)과 한참 떨어진 먼 변방의 땅이며 훗날 이태백(李太白)이 "촉으로 가는 길,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어렵다(蜀道之難難于上靑天)"고 읊은 익주(益州. 오늘날의 쓰촨성)에서는 흥한(興漢)의 기운이 한줌 싹트고 있었다.
그리고 한낱 일개 지방의 군세(軍勢)로 강력한 위나라를 징벌하기 위해 다섯 차례나 단행된 북벌(北伐)의 중심에는 촉한(蜀漢)의 평북대도독(平北大都督) 승상(丞相) 무향후(武鄕侯) 영익주목(領益州牧) 지내외사(知內外事) 제갈량(諸葛亮)이 있었다.
*오늘날 중국 공산당은 탈북자 강제북송 등 인권 유린에 앞장서고 있는 악(惡)적인 존재이지만, 이와는 별개로 중국 후한 말기의 혼란기를 기록한 삼국지(三國誌)가 인류의 고전(古典)으로 남고 있다는 관점에서 제갈량의 전술을 다루고자 한다.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의 초상화]
명(明)나라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이 만든 소설 삼국지(三國誌)는 흔히 '7할의 진실과 3할의 거짓'이라 평가할 정도로 소설적 재미를 위해 허구로 각색된 내용이 많다.
그러나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여 죽은 후에야 그만둔다(鞠躬盡瘁 死而後已)"는 내용의 출사표(出師表)와 함께 서기 227년 단행된 제갈량의 북벌과 이 때 전개된 위나라 신성(新城)태수 맹달(孟達)에 대한 심리전술은 나관중에 앞서 진대(晉代)의 역사가 진수(陳壽)가 남긴 '정사(正史)삼국지'에도 기술되어 있을만큼 사실적인 사건이다.
본시 맹달은 제갈량과 함께 촉한의 1대 황제 유비(劉備)를 섬기던 장수였다. 유비의 촉한 공략 당시에는 중원에서 익주 지역으로 통하는 관문 중 하나인 가맹관(葭萌關)에 주둔하면서 한중(韓中)에 할거하던 장로(張魯. 중국 민족종교인 도교의 창시자 중 한 명)의 세력을 견제하는 등 공로가 컸다.
그러나 유비의 부장이자 의형제로서 형주(荆州. 오늘날의 징저우)를 지키던 관우(關羽)가 양주(揚州. 오늘날의 안후이성 일대)의 손권(孫權)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하고 이를 방관한 죄목을 얻게 되자 위나라로 망명했다.
맹달이 맡은 신성은 3개 군(郡)이 통합된 지역으로서 맹달은 사실상 위나라의 서남쪽 지역을 도맡아 통치하면서 막대한 병력을 보유했다. 게다가 신성은 위나라 수도 낙양(洛陽. 오늘날의 뤄양)과의 거리도 비교적 가까웠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수도방위사령부의 역할도 했다. 일개 망명자에게 이러한 막대한 임무를 맡긴 것은 맹달에 대한 위나라 조정의 신임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줬다.
맹달로서는 촉한에 다시 투항할 마음도, 투항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일세(一世)의 전술가였던 제갈량은 수 년에 걸친 끈질긴 심리전술 끝에 맹달의 배반을 이끌어내고 위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끌고 갔다.
이 과정을 설명하기에 앞서 제갈량의 과거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아보자.
이미 황숙(皇叔. 황제의 숙부)이라는 어마어마한 벼슬을 갖고 있었던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慮. 인재를 얻기 위해 세 번이나 먼 길을 찾아감) 끝에 얻은 제갈량은 위촉오(魏蜀吳) 3국이 천하를 나눠갖는 대신 촉오 양 국이 동맹을 맺고 위를 견제한다는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구상할 정도로 뛰어난 지략의 소유자였다.
비록 천하삼분지계가 당시 식자(識者)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공론화되고 있던 구상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를 보다 체계화하고 몸소 실천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제갈량은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으며, 훗날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에서 똑똑한 사람을 두고 "똑똑하기가 제갈량 못지 않다"고 평가하는 유행이 퍼졌을 정도로 제갈량은 만인(萬人)이 인정한 인물이었다.
제갈량은 그 스스로가 군사를 이끌고 싸우는 지휘관의 능력보다는 지휘관을 보좌해 각종 전술을 짜내는 책략가의 능력이 한층 더 높았다. 이를 보여주는 한 사례가 219년 한중 지방에서 위왕(魏王) 조조(曹操)와 유비가 격돌한 '한중전투'다.
당시 유비는 조조의 세력 아래 놓여져 있던 지역이자 과거 한고조 유방이 항우(項羽)를 격파하기 위해 근거지로 삼았던 전략적 요충지인 한중을 얻기 위해 그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출병했으며, 조조는 사촌동생인 조홍(曹洪)과 명장(名將)으로 명성이 높던 장합(張郃)을 선봉으로 삼아 이를 막으려 했다.
가장 먼저 충돌한 것은 유비의 또 다른 의형제인 장비(張飛)와 장합이었다. 조조는 장합에게 장비가 지키고 있던 파서(巴西. 오늘날의 랑중) 지역으로 진격해 그 곳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으며, 이에 장비는 1만여 병력을 이끌고 나아가 3갈래로 진군한 장합과 50여일 간 대치한 끝에 극적으로 물리쳤다.
당초 장비는 뚜렷한 승기를 쥐지 못했다. 장합이 3개의 진채를 굳게 지키며 싸우려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래부터 애주가였던 장비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적군을 앞에 둔 채 술독에 빠져 지내기 시작했으며, 이에 크게 걱정이 된 유비는 부장이자 훗날 한중 태수가 된 위연(魏延)을 보내 장비를 단속하려 했다.
이 때 제갈량은 유비를 만류하면서 오히려 좋은 술을 더 많이 보내 장비가 한 층 취하도록(?) 만들 것을 권유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생사(生死)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술에 만취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으나, 제갈량이 예견한 대로 장비는 결국 '술'을 이용해 장합을 격파하고 한중 공략의 길을 열었다.
주량이 대단했던 장비는 일부러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척하면서 장합의 승리욕을 돋군 뒤 그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기습토록 유인한 다음 미리 매복해두었던 군사로 역(逆)기습한 것이었다.
만약 이 때 제갈량이 '술'을 더 보내지 않았더라면 장합을 꾀어들이기 위한 이러한 심리전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으며, 알콜 중독자 수준으로 애주가였던 장비는 장비대로 단 한방울의 술도 마시지 못할 경우 '알콜 금단증상'을 이기지 못해 군사를 제대로 통솔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제갈량은 술을 좋아하는 장비의 성격과 조조에게 보낼 승전보에 목말라 있는 장합의 초조함을 꿰뚫어 이 같은 기막힌 심리전을 짜냈던 것이다.

[뤄양(洛陽) 교외에 위치한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 백마사(白馬寺). 유서깊은 도시인 낙양은 후한(後漢)을 일으킨 광무제(光武帝)가 수도로 정한 이래 수백년 간 천자(天子)의 자리를 노린 숱한 영웅호걸들의 격전지가 되어 왔다. 제갈량도 한제국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낙양 수복(收復)을 위한 위나라 제후(諸侯)의 배반이라는 원대한 심리전술을 구상했다]
맹달의 배반은 정사 삼국지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당초(220년) 촉장 맹달이 투항하자 위 조정은 그를 후대했다. 선제(宣帝. 진나라 초대황제 사마염의 조부이자 위나라 명장이었던 사마의)는 맹달의 언행이 교묘하여 믿을 수 없다고 여러 차례 간했으나 무시당했고 오히려 맹달을 영신성태수로 임명하고 후(侯)에 봉하고 가절(假節)로 삼았다. 이에 맹달은 오와 연결하고 촉과의 관계를 공고히 해 몰래 중국(위나라)을 도모하려 했다.
촉의 승상 제갈량은 이런 맹달의 반복(反覆)함을 증오했으나 (일이 누설되어) 그가 화를 입을 것도 염려했다. 맹달은 위흥(魏興)태수 신의(申儀)와 사이가 벌어졌는데, 제갈량이 거사를 독촉하기 위해 곽모(郭模)를 거짓으로 투항시켰다가 신의에게 그 계책이 누설되었다. 맹달은 계책이 누설되었다는 얘기를 듣자 바야흐로 거병하려 했다.
선제는 맹달이 신속히 출병하는 것을 걱정하여 서신을 보내 달래기를 "장군은 지난 날 유비를 버리고 (위)나라에 몸을 의탁했소. 나라가 장군에게 국경을 맡겨 촉을 도모하는 임무를 주었으니 가히 심관백일(心貫白日)이라 할 만하오.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를 가리지 않고 촉사람들은 모두 이를 갈며 장군을 증오하며, 제갈량은 우리가 서로 싸우기를 바라므로 고난을 피할 수 없는 형편이오. 곽모가 말한 내용이 사소한 일이 아닌데 제갈량이 어찌 경솔하게 일이 누설되게 했겠소? 지금의 위태로움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오"
맹달은 서신을 읽고 크게 기뻤으나 주저하여 결단하지 못했다 - 삼국지 선제기(宣帝紀)>
<이엄(李嚴)은 맹달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나는 공명(孔明. 제갈량)과 함께 선제(유비)의 의뢰를 받았습니다. 걱정이 깊고, 책임은 중대합니다. 좋은 조력자를 얻고자 염원하고 있습니다"
제갈량도 역시 맹달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부대 편성에 있어서 마치 물 흐르듯 질서를 유지하며, 나아가고 물러섬에 지체함이 없는 것은 정방(正方. 이엄)의 성격에 따른 것이오"
그가 중요시되는 것은 이와 같았다 - 삼국지 이엄전>
맹달에 대한 제갈량의 심리전술에는 두 명의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이엄과 곽모라는 사람이다.
이엄은 유비를 섬기기 이전부터 맹달과 의형제에 준하는 친분을 가졌던 인물로 촉한에서 건위(犍爲)태수, 홍업(興業)장군, 상서령(尙書令)을 지내는 등 중책을 맡았던 인물이다. 제갈량은 우선 이 이엄을 동원해 맹달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으며, 이는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맹달이 처한 정치적 위기도 큰 역할을 했다. 위문제 조비가 집권할 당시에는 맹달은 그의 신임을 얻어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으나, 조비가 죽고 그 아들 조예(曹叡)가 등극하자 그동안 맹달을 시기하고 질투하던 사람들로부터 갖은 중상모략을 받기 시작했다. 맹달은 본시 촉한에서 망명한 인물로 위나라에 정치적·인(人)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불안감이 고조되던 때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맹달의 마음을 완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신의(信義. 신용)가 크게 중시되던 시대였다. 이미 첫 주인이었던 유장(劉璋)을 배반한 데 이어 유비까지 배반한 적이 있는 맹달로서는 그가 아무리 철면피(鐵面皮)라 하더라도 3번째 배반의 길을 선뜻 선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게다가 당장 목에 칼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한 번 기반을 잡은 곳에서 꾸준히 권력과 재산을 유지하려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 심리이기 때문에 태수이자 제후(諸侯)의 벼슬을 하고 있던 맹달로서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촉한으로 돌아가기도 어려웠다. 촉한 조정이 '배신자'인 그에게 위나라에서의 그것에 준(準)하는 벼슬을 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이 때 제갈량이 다시 움직인 인물이 곽모다. 오늘날로 치면 적국에 침투해 각종 공작(工作)을 실시하는 정보기관 소속 비밀요원이었던 곽모는 제갈량의 특명을 받고 위나라에 거짓 투항한 뒤 맹달의 배반을 위나라 조정에 고발했다.
제갈량은 바로 맹달의 배반이라는 극비(極祕)를 일부러 누설시킴으로서 대역죄를 지고 참수당할 위기에 처한 맹달이 어쩔 수 없이 모반을 일으키도록 만든 것이었다. 삼국지 선제기에 나오듯 오직 사마의(司馬懿. 선제)만이 "곽모가 말한 내용이 사소한 일이 아닌데 제갈량이 어찌 경솔하게 일이 누설되게 했겠는가"며 제갈량의 심리전을 꿰뚫어보았으나 조정에서 맹달의 무고함을 믿어주지 않는 이상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맹달의 거병(擧兵)으로 인해 위나라는 바야흐로 멸망의 위기를 맞이했으며, 촉한은 흥한(興漢)의 결정적 기회를 맞이했다.
그가 다스리는 신성과 낙양은 1~2천리 거리였다. 날랜 기병을 내어 밤낮으로 진군할 경우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안에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게다가 위나라 병력의 태반은 제갈량의 북벌을 막기 위해 대장군 조진(曹眞)의 휘하에 집결되어 서쪽 전선으로 나가 있었으며, 촉한과의 접경 지역인 신성을 지키던 맹달은 국경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여전히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맹달이 낙양으로 군사를 움직일 경우 텅텅 비어있는 낙양은 그대로 함락될 수밖에 없었으며, 위나라 황제는 포로가 되어 조진의 항복을 유도해내기 위한 볼모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맹달이 처한 상황을 파악한 사마의마저 낙양이 아닌 타지(他地)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그의 앞을 가로막을 존재는 없었다.

[대북(對北) 전단을 살포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북한인민해방전선 회원. 인민군 출신 탈북자들의 대북 심리전은 북한 현지 장병들의 전향(轉向)과 같은 효과를 이미 상당수 낳고 있다. 이들은 인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영상이 담긴 알판(CD)·DVD의 북한 내부 반입을 돕는 등의 방식으로 민주화를 촉진시키고 있다]
비록 제갈량이 펼쳤던 심리전술은 사마의의 허를 찌르는 기습에 의해 맹달이 참수당함으로서 실패로 끝났지만 만약 성공했을 경우 중국사(史)를 완전히 뒤바꿔놓았을 희대(稀代)의 전술이었다.
사실 위나라가 패망을 모면한 것도 요행이었다. 사마의는 천자(天子. 황제)에게 먼저 보고한 뒤 군사를 움직이는 당시 관행을 깨고 먼저 군사를 움직이고 나서 천자에게 보고하는 파격적인 방식을 택함으로서 맹달이 거병한지 불과 8일만에 기습을 감행해 신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만약 그 때 사마의가 관행대로 움직였거나 위나라 조정이 천자의 허락 없이 멋대로 군사를 움직인 죄목을 물어 사마의를 참수했더라면 제갈량의 전술은 성공할 수 있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상책(不戰而勝)"이라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요체(要諦)를 그대로 실천에 옮긴 제갈량의 심리전술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노동당 비서 출신으로 97년 국내로 망명해 수년 간 필자와 서울 여의도 모처에서 비공식 만남을 가진 故 황장엽 선생에 따르면 북한 내부에는 수령독재에 불만을 가진 군부(軍部)세력이 적잖이 존재한다.
특히 영관급 장교 및 지방 야전군 지휘부에 그러한 경향이 만연하다. 단 한 명이 독재를 실시하는 북한의 특성상 군부의 핵심 수뇌부는 능력보다는 충성심에 중점을 두고 선발되며, 이는 능력있는 군인들이 좌천(左遷)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출신성분' 따위로 인해 승진의 기회를 평생 얻을 수 없는 이들로서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90년대 발생한 '6군단 쿠데타 사건'이다. 탈북자들의 여러 증언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있는 이 쿠데타에서 6군단 지휘부는 심지어 군(軍)을 사상적으로 감독하는 정치지도원까지 합세한 가운데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북한 특유의 '물샐틈없는' 감시 체계에 적발되어 무력진압되고 말았지만 이는 황 선생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주요 사례로 남고 있다.
중국·북한 현지의 다수의 소식통에 의하면 김정은 집권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총참모장이었던 리영호를 필두로 지방 야전군까지 지휘부가 대거 숙청되고 있는 가운데 김정일에 비해 아직은 미약한 김정은의 독재력까지 겹쳐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북한 군부를 상대로 강력한 심리전술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맞고 있다. 국내에는 현재 약 2만 명의 탈북자가 거주하고 있으며, 이 중 적지않은 인민군 출신 탈북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은 '북한인민해방전선(겨레얼통일연대)' 등의 단체를 조직해 대북(對北) 심리전의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다.
이들을 정부가 적극 활용한다면 우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군 출신 탈북자들은 그 누구보다 인민군 장병들이 처한 고난을 잘 알고 있으며, 남북(南北)을 모두 체험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들 탈북자가 인민군을 상대로 왜 북한 수령독재 체제가 잘못되었으며, 왜 반(反)체제 혁명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면 북한 체제는 그대로 위기를 맞이하고 만다.
여기에는 90년대와 달라진 북한 내 풍속도 큰 역할을 한다.
90년대에는 지금과 같이 해외 라디오·전단·TV·알판(CD)·DVD 시청이 활발하지 못한 탓에 6군단의 쿠데타가 도미노 효과(Domino Effect)를 일으키지 못했지만 지금은 가능하다. 특정 지역에서 쿠데타가 발발할 경우 다른 지역의 군부도 해외 매체 시청을 통해 쿠데타 발발 소식을 접하고 뒤따라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게 된다.
인민군 장병들로서는 폐쇄되어 있는 수평적 정보 공유 체계 대신 해외 매체를 통한 정보 습득을 통해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여타 부대에 비해 지휘부의 충성도가 한 층 높은 평양방어사령부의 전향(轉向)을 유도하는 한편 '전략로케트군'과 같은 대량살상무기(WMD) 전담부대의 변화를 이끌어냄으로서 궁지에 몰린 김정은 집단의 극단적 도발을 막을수만 있다면 한반도는 그대로 자유통일(自由統一)의 기회를 맞이한다.
끊어진 다리가 연결되는 그 날 북한의 인권은 해방되고, 남북은 서로의 자본과 자원을 접목해 21세기 한민족의 엘도라도(El Dorado)를 향해 항해하게 될 것이다. 심리전술은 이를 현실로 실현시킬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겨레얼통일연대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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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SnTY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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