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전술가들 ① - 수부타이(速不台)

본문
21세기는 바야흐로 무인(無人) 전쟁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무인 정찰기에서부터 공격기, 지뢰 등을 탐색하는 로봇 등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 대신 전자회로와 강철로 이루어진 병기들이 전장을 누비고 있다. 이 무인 병기들을 운용하는 쪽은 그만큼 승리의 확률을 높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본시 전쟁은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또 다른 형태의 정치적 행위이다. 19세기 초 프로이센(지금의 독일)의 전략가였던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는 그의 저서 '전쟁론(Vom Kriege)'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은 다른 수단들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다" 영토 수호와 조국 통일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쟁은 결국 인간에 의해 직접 진행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각종 무인 병기가 발달하고 있는 21세기 오늘날에도 전쟁의 주체는 여전히 인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인간의 지적 능력을 뛰어넘거나 그에 준하는 인공지능(AI)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정치적 목적을 완벽히 이해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각종 전술을 짜내는 존재는 결국 인간일 수밖에 없다.
새롭게 시작하는 '세기의 전술가들' 시리즈에서는 수천년 인류 전쟁사(史)에 등장한 동서양의 무수한 전술가들의 활약을 근거로 다가오는 북진(北進)통일의 그 날 남북 장병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김정은 집단을 제거하고 북한 주민들을 해방시킬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코자 한다.
*'한반도의 무기들' 시리즈는 지금과 같이 계속해서 매주 연재될 예정이다.

<칭기즈칸(成吉思汗. Chingiz Khan) 초상화>
13세기 경, 인류 역사상 두 번째의 극동(極東)-서양간 대규모 군사적 충돌이자 인류사를 크게 뒤바꿔놓은 일대(一大) 사건이 발생했다.
'말(馬)에서 내리지 않는' 아시아의 군대가 당시 유럽의 강국이자 동쪽 관문이었던 헝가리를 침공한 것이다. 유럽인에 비해 비교적 작은 체구에 갑옷 대신 가죽옷을 껴입고 활과 화살로 무장한 채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이 군대는 그러나 순식간에 헝가리-슐레지엔(독일)-폴란드 등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동유럽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 군대를 실질적으로 이끈 인물, 수부타이(速不台)가 있었다.
인류 역사상 2번째로 큰 영토를 정복한 몽골 제국의 1대 대칸(大汗)이자 중국 전역을 통치한 원(元)나라의 태조(太祖) 칭기즈칸(成吉思汗)의 오른팔로 활약했던 수부타이는 2대 황제로 등극한 오고타이(窩鏶台)의 명령을 받들어 15만의 대군을 이끌고 출병해 러시아의 여러 공국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동유럽은 물론 서유럽까지도 공포로 몰아넣었다.
당시 명목상 총사령관은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오고타이의 조카이며 훗날 몽골 제국의 한 부분인 킵차크한국(金帳汗國. Kipchak Khanate)의 군주가 된 바투(Batu)였으나 실질적인 지휘관은 경험 많은 노련한 노장(老將)이자 자비심과는 거리가 먼 수부타이였다.
헝가리 침공에 앞서 약 10여년 전인 1221~1223년 수부타이는 이미 러시아 남부를 공격한 바 있었다. 당시 그는 대규모 유럽 진군에 앞서 '정찰' 차원에서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출병해 칼가(Kalka)강 전투에서 18개 남부 러시아 공국 연합군을 격파시키고 회군함으로서 충분히 유럽군에게 승리할 수 있다는 오고타이의 자신감을 북돋워주었다.
1235년 15만 대군을 이끌고 또 다시 러시아 남부에 진입한 수부타이는 '앞에서 걸리적거리는' 볼가-불가르(Volga-Bulgar) 왕국의 군대를 가볍게 물리치고 수도로 입성해 5만명을 학살한 다음 1237년 12월 러시아 북부로 진격해 대도시 리아잔(Riaza)에서 또 한 번의 '피의 축제'를 벌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리아잔은 "죽은 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자도 없었다"고 할만큼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남자들은 모조리 도륙했고 여자와 사제들이 피신한 교회당에는 불을 질렀다.
또 다른 도시 콜롬나(Kolomna)도 수부타이 앞에 마찬가지의 운명을 맞았으며, 뒤늦게 대군을 모아 대항한 블라디미르(Vladimir)의 대공 유리 2세(Yuri II)도 그 자신이 목이 잘려 죽는 것 외에는 별다른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이후 수부타이는 다시 대군을 통솔해 키예프(Kiev) 등 남부 러시아에 남아 있는 공국들을 마저 처리하고 약 4년 간의 러시아 원정을 마침내 마무리했다(유럽 원정 후 바투는 러시아에 킵차크한국을 세우고 1대 군주로 등극했으며, 러시아인들은 이후 약 300년간 몽골인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수부타이의 러시아 정복은 '몸 풀기'에 불과했다. 사실 당시 러시아의 여러 공국은 제대로 된 성채를 갖추지도 못했을 뿐더러 군사적 측면에서도 크게 뛰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러시아군이 강력한 궁기병 외에 철갑으로 중무장한 소수의 중기병, 중국과 서아시아의 공성(攻城)기술자들을 보유한 몽골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했으리라.

<몽골군과 유럽군의 충돌을 그린 삽화>
수부타이의 러시아 원정이 끝날 무렵해서 헝가리 왕국의 국왕 벨라 4세(Bella Ⅳ)는 뜻밖의 사건으로 크게 흥분했다. 평소 야만인으로 취급하던 러시아인들 중 약 20만 명이 제 발로 찾아와 기독교로 개종하는 대신 백성으로 받아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당시 유럽은 로마의 교황이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다. 유럽 각 국의 왕들은 제위(帝位)식과 함께 교황의 승인을 반드시 받아야만 했을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한 두 명도 아니고 무려 20만 명을 한꺼번에 개종시켰다고 교황청에 보고할 경우 자신의 권위는 한 층 높아질 것임이 분명했기에 벨라 4세는 기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헝가리 왕에게 러시아인들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들은 러시아가 겪은 참상을 전하면서 "지옥의 군대가 지금 근처에 와 있다"고 경고했다.
'지옥의 군대' 그러나 너무 흥분한 탓일까, 아니면 자만심 때문이었을까. 벨라 4세는 유럽에서도 최강으로 손꼽히는 자신의 군대를 믿고 러시아인들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그럴만도 했다. 21세기 오늘 날에도 스스로를 훈족(Hun. 4세기 경 극동 세력에 의한 최초의 유럽 침공을 일으킨 흉노족의 일파)의 후예라고 주장 중인 헝가리인들은 원래부터 호전(好戰)적이었으며, 싸움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철저한 오판이었다.
1241년 헝가리에 진입한 수부타이와 바투는 화약을 이용한 심리전(당시까지 헝가리군은 아직 화약이라는 존재를 알지 못했으며 그 폭발음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과 궁기병을 이용한 기동성을 이용해 접전 끝에 헝가리군을 무찔렀다.
당시 수부타이가 운용한 몽골군의 가장 큰 특징은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궁기병이었다. 온 몸을 감싸는 20~30kg 무게의 철제 갑옷과 길다란 마상(馬上)창으로 무장한 것도 모자라 말에게까지 갑옷을 입힌 유럽 기병대는 기동성에서 크게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가죽 갑옷으로 가볍게 차려입은 몽골군은 퇴각하는 척 하면서 몸을 180도 돌려 등 뒤로 활을 쏘는 방식으로 그들을 가볍게 격파했다.
설사 창과 칼이 맞부딪히는 근접전이 펼쳐진다 해도 몽골군은 소수지만 강력한 중기병대를 이용해 이를 막아냈으며, 그 사이 궁기병대가 기습적으로 측면을 기습하는 방식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중기병대의 무장력은 유럽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으며, 궁기병의 활과 화살은 두꺼운 갑옷도 꿰뚫을 정도로 강력했다.
또 다른 특징은 식량이었다. 통상 장거리 원정에는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가 필요하며 보급로가 길어질 경우 전쟁 자체에 크나큰 지장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식량이 그러냈으나 몽골군은 육포(고기를 말린 것)를 군량 삼아 유럽과의 대륙간 전쟁까지 무난히 치를 수 있었다. 수분이 다 빠져나간 육포는 장기간 보관이 가능했다(당시 육포를 처음 본 유럽인들은 몽골군이 생고기를 먹는 것으로 착각했다)
10만 명의 헝가리군과 맞닥뜨린 사요(Sajo)강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바투의 근위대까지 참여해 30여 명이 전사할 정도로 치열한 근접전이 펼쳐졌지만 수부타이가 지휘하는 3만의 궁기병이 측면을 기습함으로서 승기를 쥘 수 있었다. 기병대가 무너진 이상 보병은 몽골군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마치 '사냥 당하듯' 여기저기에서 날아드는 화살에 비명을 지르며 하나둘씩 쓰러졌다.
헝가리군은 특유의 수레방진(수레를 사방으로 빙 둘러싸 임시로 쌓은 방어벽)으로 퇴각해 굳게 지킬 수밖에 없었으나, 몽골군은 말린 고기로 체력을 비축하면서 원시적 형태의 대포(Cannon)을 이용해 마침내 진세를 무너뜨리고 마지막 한 명까지 무자비하게 전멸시켰다. 심지어 도처의 마을로 숨어든 병사들까지 모조리 색출했다.

<몽골의 역사를 그린 드라마 中 한 장면. 마상(馬上)에서 활을 든 모습은 몽골의 트레이드 마크다>
참상은 비단 헝가리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이 곳에서 연출된 장면은 한 층 끔찍했다.
수부타이의 명령을 받아 불과 2만 명의 별동대를 이끌고 슐레지엔(Schlesien. 오늘 날의 독일 일부 지역)으로 진군한 오고타이의 손자이자 훗날 오고타이한국(窩鏶台汗國)의 군주가 된 카이두(Kaidu)는 슐레지엔-폴란드-실레시아(Silesia. 오늘 날의 체코 일부 지역)-보헤미아(Bohemia. 체코 서부 지역)-튜턴 기사단(Deutscher 0rden. 독일계 종교 기사단) 연합군을 격파하고 슐레지엔 대공 하인리히(Heinrich)의 목을 베었다.
이 레그니차(Legnica) 전투에서도 수부타이식 전술이 빛을 발했다. 연합군이 모두 하나로 뭉치기 전에 각개격파해야 한다고 판단한 카이두는 5만 명의 보헤미아군이 합류하기 전에 하인리히를 공격했으며, 선봉에 선 폴란드 기사단이 돌격하자 궁기병을 양 쪽으로 벌려 세워 화살비를 퍼부었다.
폴란드군이 전멸하는 것을 지켜본 하인리히는 기사단과 용병, 보병으로 구성된 본대의 돌격을 명령했으며, 카이두는 돌연 퇴각하는 척 하면서 적군을 깊숙히 끌어들인 뒤 매복 중이던 궁기병대를 양 쪽에서 출격시켜 또 다시 화살비를 쏟아냈다. 급하게 추격하느라 보병과 거리가 떨어진 기병대는 그대로 포위되어 몰살당했으며, 뒤따라 온 보병들마저 헝가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냥 당하듯 죽음을 맞이했다.
몽골 궁기병대에 비해 기동성이 떨어지는 연합군 기사단과 보병은 다가갈만하면 도망가고, 또 다가갈만하면 도망가면서 활을 쏘는 몽골군을 상대로 창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했다. 하인리히는 전투 중 생포되어 참수된 뒤 발가벗겨진 채 그 시체가 벌판에 버려졌으며, 소수를 제외한 연합군들도 모조리 도륙당했다.
당시 몽골군은 적군의 목을 벤 뒤 그 귀를 잘라 전리품으로 가져가는 것이 관습이었다. 전투 후 전장으로 뛰어간 하인리히의 아내는 목 없는 시체들 속에서 발가락이 6개인 시체를 발견하고 비로소 남편임을 알아봤다고 한다.
러시아와 동유럽으로부터 탈출한 유랑민들로부터 아시아에서 온 '지옥의 군대'의 소문을 접한 서유럽은 크게 동요했다. 유럽의 동쪽 관문인 헝가리가 점령당하고 동유럽 연합군이 모조리 패배한 가운데 서유럽만으로 몽골군을 막아낼 자신은 없었다. 장궁(長弓)으로 무장한 영국은 너무 멀리 있었고, 많은 국가들이 11세기부터 시작된 십자군 전쟁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천우신조(天佑神助)였을까, 마음 졸이며 수부타이의 공격을 기다리던 서유럽 국가들에게 급보가 날아들었다. 돌연 몽골군이 전부 철수해 대도(大都. 원나라 수도. 오늘 날의 베이징)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무런 협상조건도 없이 깨끗이.
수부타이가 서유럽 침공을 앞두고 돌연 군사를 거둔 원인은 오고타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몽골의 관습상 대칸(大汗)이 사망할 경우 모든 황족이 본토로 돌아와 다음 대칸의 선출을 위한 일종의 선거인 쿠릴타이(Khuriltai)에 참석해야만 했다. 황족이자 황위 계승권자인 바투와 함께 군(軍)을 이끌던 수부타이로서는 그간 점령한 동유럽의 영토까지 포기하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만약 그 때 오고타이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몽골군이 그대로 서유럽까지 진입해 인류 역사를 완전히 바꿔놓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육군에서 운용 중인 블랙호크(Black Hawk) 헬기. 10여 명의 병력을 수송할 수 있으며 7.62mm M-134 미니건 등으로 무장한다>
수부타이의 전술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앞서 언급했지만 기동성과 보급력이다.
강력한 엔진이 보편화된 근대에도 이 두 가지는 전쟁의 승패 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다. 수부타이의 전술을 본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육군원수인 에르빈 롬멜(Erwin Rommel)은 전차의 속력을 이용한 전격전(Blitzkrieg)을 펼쳐 큰 승리를 얻은 바 있으며, 1차 걸프전 이후 미국도 모든 정규전을 1달 이내에 종결짓고 있다.
반면 6.25전쟁 당시 김일성은 보급로 확보를 소홀히 함으로서 유엔 연합군이 승리하는 빌미를 스스로 제공했다.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총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서울이 수복되자 그대로 보급로가 막힌 채 포위된 남한 내 인민군 장병들은 항복하거나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작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북진(北進) 통일의 그 날 우리는 기동성과 보급로 확보에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한다. 아무리 각종 순항·탄도미사일 등으로 1호 청사를 폭격한다 해도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지 않는 이상 전쟁의 근본적 목적인 '자유 통일'이라는 정치적 목표는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정은 집단은 우리 군(軍)의 기동성 및 보급로 확보를 저지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구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인민군 출신 탈북여성 이모 씨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동해안에는 해병대의 신속한 상륙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일종의 '모래 성벽'이 쌓여 있으며, 실제 위성사진으로도 확인한 바 있다. 내륙 지역에도 주요 도로에 장애물을 설치해두고 유사시 폭파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또 10만여 규모로 알려지는 특수전 부대를 운용하면서 우리 군이 평양 등 북한 내부로 깊숙히 진격할 경우 그 후방에 침투시킴으로서 보급로를 막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주민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김정은으로서는 필요할 경우 마치 수부타이가 적군을 깊숙히 끌어들여 매복 공격을 가했던 것처럼 주요 대도시에 핵탄두를 설치한 뒤 우리 군 병력의 진입 직후 폭파시킴으로서 진군(進軍)을 막고 동시에 보급로를 차단하려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김정은 집단의 노림수를 무력화시키고 그 취약지점으로 병력과 물자를 신속히 투입시킬 수단, 바로 헬기(Helicopter) 전력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
헬기의 가장 큰 장점은 김정은 집단이 지상에 설치해둔 각종 장애물이나 특수전 병력을 피해 공중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수전 병력이 기관총 등으로 대공(對空) 사격을 가한다 하더라도 UH-60 블랙호크(Black Hawk) 헬기는 시속 257km의 빠른 속력과 다양한 자체 무장으로 이를 무력화할 수 있다.
또 수직이착륙이 가능하다는 특성상 별다른 공수(空輸) 훈련을 받지 못한 병사들도 쉽게 실어나를 수 있으며, 정지비행이 가능하다는 특성상 낙하산을 멘 군수물자를 공중에서 지상으로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작용한다. CH-47 치누크(Chinook) 헬기는 전투식량은 물론 야포와 같은 중화기도 수송할 수 있다.
헬기를 통해 북한 내 주요 공항에 병력과 물자를 수송함으로서 활주로를 확보할 경우 대형 수송기를 이용해 전차 등을 추가로 보급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해당 지역을 완벽하게 우리 군의 통제권 하에 둘 수 있으며, 이 활주로에서 출격한 전투기로 주변 지역을 폭격한 뒤 폭격 지역에 헬기로 병력을 수송해 점령하는 방식으로 점진적이고도 신속하며 지속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다.
설사 궁지에 몰린 김정은 집단이 핵무기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공중으로의 신속한 병력 탈출로 피해를 줄일 수 있으며, 후퇴한 병력을 폭심지 위를 거쳐 다시 전방으로 수송할 수 있다.
북한군의 대공 전력이 기타 전력에 비해 비교적 취약하며 우리 군이 사전에 각종 미사일 전력으로 대공 포병기지 등 주요 거점을 폭격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헬기는 지상군의 기동성과 보급력에 있어서 확실한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신속한 진군과 확실한 보급은 전쟁의 기간을 그만큼 단축시키며 이는 남북 장병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기능도 한다.
[겨레얼통일연대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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