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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전술가들 ④ -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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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北京).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21년) 당시 '7웅(七雄)' 중 하나인 북방의 연(燕)나라가 수도로 정한 이래 요(遼)·금(金)·원(元)·명(明)·청(淸), 그리고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약 800년간 중국의 수도로 자리매김해온 도시다.
 
베이징 한 켠에 우뚝 솟은 자금성(紫禁城)은 중국이 만리장성(萬里長城)과 함께 내세우고 있는 국가 상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베이징이 곧 중국이며, 중국이 곧 베이징이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1,600년 전. 이 베이징이 다름아닌 우리 한(韓)민족에 의해 한 때 점령되다시피 했던 역사적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중국의 심장부'에 대한 이 공격으로 말미암아 중국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 때 광활한 영토의 화북(華北) 지방을 다스렸던 후연(後燕)은 멸망의 길을 걸었으며,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정복한 이래 중국의 지배 아래 있던 요동(遼東. 오늘날의 지린성 및 랴오닝성 일부) 지역과 이를 경계로 하는 동북아의 광활한 영토는 모조리 한민족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지금은 잊혀져버린, 그러나 찬란했던 영광의 시대.
 
민족사(史)에서 가장 거대했던 규모의 이 원정을 감행한 고구려군의 중심에는 21세기 오늘날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에 서 있는 한 고색찬란(古色燦爛)한 비석을 통해 여전히 과거의 용맹스러웠던 이름을 후세에 전하고 있는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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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2)] 
 
배달민족과 한족(漢族) 간 전쟁의 역사는 머나먼 신화(神話)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만큼 오랜 세월동안 진행되었다.
 
주류(主流) 사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이론이지만 일부 재야 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전 2700년경 중국을 다스린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와 대륙의 패권을 두고 충돌했던 치우천왕(蚩尤天王)은 한민족의 조상이다.
 
중국 역사에 의하면 헌원씨는 중원(中原)을 최초로 통일한 인물로서 지금도 한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농사의 신(神)이었던 신농씨(神農氏)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 있었으나, 그 이전에 치우천왕과의 수십 번의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한 때 패망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치우천왕이 우리 민족의 조상이냐 아니냐를 두고는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치우천왕의 존재 자체와 치우천왕-헌원씨 간 전쟁의 기록은 여러 고서(古書) 곳곳에 남아 있다.
 
중국 산해경(山海經)에는 "치우가 병기를 만들어 황제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나오며, 사기(史記)의 주석본에는 "구려(九麗)의 군주는 치우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한(漢)나라를 건국한 유방(劉邦)이 항시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을 정도로 중국인들은 치우천왕을 한족의 역사와 결부시키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축구 국가대표팀 서포터즈 '붉은악마'의 심벌(Symbol)로 사용될 정도로 치우천왕을 우리 민족의 조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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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왕(蚩尤天王)의 형상. 머리에 달린 뿔과 부릅뜬 눈, 긴 송곳니 등 악귀(惡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이는 당시 치우천왕에게 느꼈던 고대 한족(漢族)의 공포와 증오가 반영된 디자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근래 국내에서는 치우천왕과 한민족을 결부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 다만 '우리민족끼리 이념' 선전 차원에서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종북(從北)세력에 의해 정치수단화(化)되는 경향도 없잖아 있다]
 
그러나 사실 광개토대왕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배달민족과 한족 간의 전쟁은 우리에게 있어서 그다지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기원전 108년 한무제는 고조선(古朝鮮)을 무너뜨리고 그 일부 지역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으며, 서기 244년 삼국(三國)시대 당시 위(魏)나라의 장수였던 관구검(毌丘儉)은 고구려를 침공해 수도인 국내성(國內城)을 점령했다.
 
사실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한족이 우월해서거나 그런 까닭이 아니며, 그들이 치른 전쟁의 빈도에서 원인이 드러난다.
 
한족은 약 500년에 걸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와 약 100년 간의 군웅할거(群雄割據) 시대 동안 서로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러왔으며, 여기에 비해 고구려는 상대적으로 전쟁 경험이 부족했다. 게다가 한족 특유의 인해(人海)전술까지 겹쳐 우리 민족이 다소 열세(劣勢)에 놓이는 결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민족 간 대결의 양상은 광개토대왕이 등장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광개토대왕. 담덕(談德)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로 374년 태어났다. 12세에 태자(太子)의 자리에 올랐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가 "나면서부터 허우대(체격)이 컸으며 뛰어나고 활달한 뜻이 있었다"고 기록할 정도로 어린 나이에 이미 영웅의 풍모(風貌)를 갖추고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베이징 공략 사실이 드러난 것은 지난 2009년 3월.
 
지배선(66)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연군(燕郡. 베이징의 후연 당시 지명) 침공 원인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고구려가 후연을 공격해 100여 명을 죽였다"는 중국 역사서 진서(晉書)의 기록을 최초로 공개했다.
 
지 교수에 따르면 수도를 유린당한 후유증 탓에 중원의 패자(霸者)였던 후연은 결국 붕괴의 길을 걸었으며, 후연을 대신해 북연(北燕)을 세운 고구려 출신의 고운(高雲)으로부터 종주국의 대접을 받을 정도로 고구려는 동북아와 중국 북부지역의 질서를 지배하는 대국(大國)으로 우뚝 섰다.
 
비록 '100명을 죽였다'고만 기록되어 있으나 지 교수는 "(진서에서) 도적을 뜻하는 '구(寇)'라는 글자가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볼 때 중국인들이 광개토대왕의 후연 공격사실을 격하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며 "100명을 죽였다는 기록은 사실과 다르게 축소된 것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소위 '중화사상(中華思想.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상)'에 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북방 유목민족(후연)에 의한 베이징 지배를 용인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져있던 당시 한족들이 멸시하고 경멸하던 '동이(東夷. 동쪽 오랑캐)'에 의한 베이징 공략이라는 이 '치욕적인' 역사를 은폐하기 위해 후연의 피해규모를 일부러 조작해 기록했다는 것이 지 교수의 설명이다.
 
고구려의 베이징 침공은 소규모 부대의 우발적 침입이 아닌, 바로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거대한 대군(大軍)의 장거리 원정이자 한족의 오만함에 대한 배달민족의 치명적인 반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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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군의 모습을 그린 고분벽화. 마갑(馬甲)까지 입힌 중장기병이 돌격해서 적진을 흐트러뜨린 뒤 뒤따라오던 보병이 칼·도끼 등으로 적군을 공격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고구려와 후연 간 전쟁의 발발에서부터 종결까지의 과정은 이렇다.
 
후연은 북방 유목(遊牧)민족 중 하나인 선비족(鮮卑族) 출신의 모용수(慕容垂)가 세운 나라다. 385년 고국양왕이 출병시킨 4만의 고구려군에 의해 요동이 습격당하자 후연은 장수 모용농(慕容農)을 보내 요동·현도(玄菟) 2개 지역을 다시 탈취하는 등 양 국은 끊임없는 영토 분쟁을 일으키며 대치했다.
 
391년 왕위(王位)에 오른 광개토대왕은 이러한 분쟁에서 고구려의 확실한 우위를 제공했다.
 
397년 요동을 공격해 이 지역을 다시 탈환한 그는 402년 후연의 영토인 숙군(宿軍. 오늘날의 랴오닝성 베이전시)을 공격하고 이듬해인 403년 후연을 재차 침공했다. 그리고 405~406년 요동과 목저(木抵. 랴오닝성 일부)을 침략한 후연의 왕 모용희(慕容熙)의 군대를 격퇴함으로서 국력이 약해진 후연이 멸망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동북아의 광활한 영토를 완전한 고구려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 5번의 큰 전투 중 어느 전투에서 광개토대왕이 베이징 원정을 나섰는지는 기록상 명확히 남아있지 않기에 불분명하다. 다만 학계에서는 403년 단행된 3차 원정 당시에 전개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광개토대왕이 어떤 전술로 군사를 이끌고 장거리를 행군(行軍)해 베이징성을 공격했는지는 역시 기록이 없기에 알 수 없지만 광개토대왕이 다른 원정에서 펼쳔던 전술들을 살펴보면 대략 유추할 수 있다.
 
알려지다시피 고구려는 배달민족 중에서도 북방에 거주하면서 유목생활을 하던 일파(一派)가 세운 나라다.
 
유목 세력답게 고구려군은 마상(馬上)무예에 뛰어났으며, 특히 말 위에서 활을 쏘는 능력이 탁월했다. 시조(始祖)인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이름인 '주몽'부터가 이미 '활 잘 쏘는 이'를 뜻할 정도였으며, 중국 또한 고구려 일파 중 핵심 일파인 소수맥(小水貊)이 생산한 활을 '맥궁(貊弓)'이라 부르며 수입해 사용할 정도였다.
 
고구려는 이 활과 말을 이용해 주변국들과의 전쟁에 나섰으며, 98년 8월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일대에서 발굴된 고구려 유적 연구 결과에 의하면 쌀을 주(主) 군량으로 삼아 식량보급을 해결했다. 고구려군은 궁기병(弓騎兵) 이외에 온 몸을 철갑으로 감싸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중장기병인 개마무사(鎧馬武士)도 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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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개마무사(鎧馬武士) 복원도]
 
광개토대왕은 이러한 기병대의 장점을 2종류의 공격 전술에 십분 활용했다. 바로 '기만(欺瞞)'과 '기습(奇襲)'이다.
 
그는 "적의 허(虛)를 찌르고 실(實)을 꾀한다"는 허허실실(虛虛實實) 병법의 대가(大家)였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적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시기에 예상하지 못한 루트로 예상하지 못한 수단을 이용해 기습을 가해 대승(大勝)을 거두곤 했다.
 
보통 큰 비가 내리거나 폭설이 내리는 날씨에는 대치 중인 양 군(軍)이 암묵적 합의를 하고 전투를 일시 중단하는 것이 관례였다. 실제로도 이러한 환경에서 군사를 움직이기란 대단히 어려웠으며, 무리하게 진군(進軍)했다가 자칫 무기가 녹슬고 군사들의 사기(士氣)가 떨어질 경우 전투는 그대로 패배의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은 "당분간 고구려군의 공격이 없겠지"라는 적장의 안일한 생각을 깨고 과감히 기습하는 용병술(用兵術)을 선보여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는 광개토대왕의 치밀한 작전수립 과정이 있기에 가능했다.
 
예로부터 "장수는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에 통달해야 한다"고 했으며, 광개토대왕은 이러한 가르침에 충실했다.
 
아무리 폭우나 폭설이 쏟아진다 해도 365일 내내 쏟아질리는 없으며, 때때로 멈추게 되어 있다. 광개토대왕은 천문 관측을 통한 기상예보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일시적으로 폭우 등이 멈추는 시기에 날랜 기병(騎兵)을 내어 방심하고 있는 적진을 기습했다. 면밀한 지리 연구로 습득한 적진까지의 최단루트나 숨겨진 샛길을 이용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광개토대왕은 또한 '미처 예상치 못한 공격수단'을 활용하기로도 유명했다. 391년 벌어진 관미성(關彌城. 오늘날의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소재) 전투에서 그는 백제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무기, 군선(軍船)을 대거 동원해 이 성을 공격했다.
 
영토의 대부분이 척박한 산악지대인 고구려에서 대규모 선단(船團)이 제조될 수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상식'을 깨고 해상(海上) 루트를 따라 강화도 북안(北岸) 방향으로 진격해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던 관미성을 포위하고 공격해들어갔다. 육로(陸路)만 경계하고 있던 백제군은 그대로 기습당한 꼴이 되었다.
 
백제가 당황하는 틈을 타 광개토대왕은 또 고구려 특유의 '날랜 기병'을 육지에 상륙시켜 육지쪽 성문을 공격케했으며, 결국 20일 간에 걸친 전투 끝에 백제군이 패배함으로서 관미성은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당시 백제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으며, 요충지(要衝地) 중에서도 최고 요충지였던 곳을 허망하게 뺏겨버린 진사왕(辰斯王)은 관미성 함락 1개월만에 분사(憤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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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김정일. '민족주의자'라 자처(自處)하는 이들이지만 실은 광개토대왕이 힘들여 개척한 민족의 영토를 외세(外勢)에 팔아먹은 진정한 매국노들이다. 현재 백두산의 절반 가량이 창바이샨(長白山)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영토에 편입되어 관광 지역화되어 있는 사실을 모르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베이징 침공 당시에도 유사한 전술이 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후연군(軍)이 미처 예상치 못한 시기에 예상치 못한 경로로 공격해들어가 허를 찔렀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몽골 일대(一帶)의 광활한 초원에서 주로 생활하던 습성 때문에 탁트인 공간에서 펼치는 전면전에 익숙하던 후연군으로서는 엉뚱한 시기에 엉뚱한 경로로 돌격해오는 고구려군에 맞서싸우기 어려웠을 것이다.
 
기병을 주력으로 하면서도 한반도 북부의 험준한 산악지역에서 주로 생활한 고구려군이었기에 험한 길을 신속하게 이동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리라.
 
더구나 베이징은 서해(황해)와도 인접해있다. 광개토대왕비에도 그 기록이 새겨져있듯 바다 건너 멀리 왜(倭. 일본)를 공격할 정도로 수군(水軍) 강국이었던 고구려로서는 베이징 공격 당시에도 각종 군선을 동원함으로서 수륙양면(水陸兩面) 작전을 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전(水戰)과는 거리가 멀었던 후연으로서는 고구려 함대가 베이징을 향해 진격해오는 것을 그저 멀거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으리라.
 
'기만'과 '기습'에 근본을 두고 있는 광개토대왕의 전술은 북한 정권과 반세기 넘게 대치 중인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에서 소리 지르고 서쪽으로 친다)'의 개념과도 일맥상통하는 기만 & 기습 전술은 과거 이미 한 차례 한반도에서 구사된 적이 있다.
 
6.25전쟁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연합군 총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마치 동해안을 통해 공격하는 것처럼 꾸며 김일성으로 하여금 서울 주둔 병력을 타지역으로 차출토록 유도한 뒤 인천에 7만여 대군(大軍)을 기습적으로 상륙시켰다.
 
서울 시내에는 소규모 경비대만이 남아 있었으며, 연합군은 이들의 항복을 이끌어내고 낙동강 전선에 있던 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서 김일성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따라서 김정은 집단은 이러한 고전(古典)적이고도 일반적인 기만·기습에는 이미 만반(萬般)의 대비를 하고 있을 것으로 보이며, 북한의 남침(南侵)에 의한 휴전협정 종결 시 우리는 김정은의 허를 찌를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 마련에 한 층 박차를 가해야만 한다.
 
광개토대왕의 전술 요소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본받아야 할 핵심 요소는 '적이 예상치 못한 루트나 수단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단순히 동쪽에 소리 지르고 서쪽을 치는 식은 안 된다.
 
예를 들어 김정은이 상상도못할 공격 루트로는 '땅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故 황장엽 선생의 생전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정권은 이미 오래전부터 수십 갈래의 길로 대남(對南) 땅굴을 파 놓은 상태이며, 그 일부는 심지어 부산까지 도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땅굴을 우리 군(軍)·정보당국이 감지할 경우 오히려 우리가 김정은을 기습하는 역(逆)루트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1~2명만이 나란히 서서 전진할 수 있는 좁은 공간인 특성상 땅굴 속에서의 남북(南北) 간 교전이 벌어질 경우 선두(先頭)에 선 인민군 병사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뒤따라오는 인민군 병사들마저 자동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우리로서는 '지향성음향장비(강력한 음파를 발사해 적을 제압하는 무기)'와 같이 비(非)살상 무기이자 김정은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무기를 앞세워 인민군 전열을 무너뜨리고 북한 땅 한복판으로 나아가 평양 '1호 청사'로 진격할 수 있다. 인민군 군복과 88식 보총 등으로 위장할 경우 김정은 집단은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할 수 없게 된다.
 
[겨레얼통일연대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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