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전술가들 ③ - 김충선(金忠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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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592년, 한반도에 거대한 피바람이 몰아쳤다.
약 100년 간 일본 열도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센고쿠(戦国. 전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모모야마(桃山) 시대를 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대륙 정복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그의 사병 집단으로 전락한 수십 만의 사무라이(武士. 무사)들을 한반도로 출병시켰다.
쇼군(將軍)으로서 명목상 전체 일본의 통치자였던 천황(天潢)보다 더 큰 권력을 누렸던 그의 앞을 막을 존재는 없었다. 이미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익숙해진 사무라이들은 무사(武士)의 시대가 끝났다는 허탈감도 잠시,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군함에 몸을 싣고 부산(釜山. 오늘날의 부산광역시)으로 향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기업을 연 이래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추구하던 조선 왕조는 이를 감당해낼 힘이 없었다. 명(明)나라로의 구원 요청이라는 치욕적인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호국(護國)에 전념했으나, 일찍이 율곡 이이(栗谷李珥)가 경고한대로 국방을 소홀히했던 조선 왕조는 일군(日軍)의 칼날 아래 도륙을 면치 못했다.
일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 의해 부산포성이 함락당하고 대쪽을 쪼개는 듯한 파죽지세(破竹之勢) 앞에 바야흐로 조선 왕조는 멸국(滅國)의 위기를 맞이했다.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漢陽. 오늘날의 서울)은 그대로 함락되고, 죄없는 백성들의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이 때 홀연히 한 명의 장수가 나타났다. 그는 그 때까지 조선군이 한 번 사용해보지도 못한 '파괴의 병기(兵器)'를 활용해 여지껏 마치 무인지대(無人地帶)를 오가듯 한반도를 유린하던 일군을 일거에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거침없이 북진(北進)하던 일군 육상부대는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났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바다에 이순신(李舜臣)이 있다면, 땅에는 김충선(金忠善)이 있다"고.

"이 나라의 예의문물(禮儀文物)과 의관풍속(衣冠風俗)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聖言)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모하당(慕夏堂) 김충선(1571~1642).
조선 왕조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자헌대부(資憲大夫) 등의 벼슬을 지냈던 장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한반도 침략으로 인해 발발한 임진왜란(壬辰倭亂)뿐만 아니라 중국 청(淸)나라가 일으킨 병자호란(丙子胡亂)에서도 무수한 전공(戰功)을 세운 명장(名將)이다.
그러나 한산대첩(閑山大捷)에서 일본 수군(水軍)을 격파한 이순신 장군에 비해 아직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임진왜란의 일등 공신(功臣) 중 한 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이렇듯 역사에 큰 흔적을 남길 수 없었던 것일까? 이는 그의 출신에서 비롯된다.
그렇다. 그는 순수한 한민족이 아니었다. 귀화인(歸化人)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한반도를 전란(戰亂)의 화염에 휩싸이게 한 나라 출신이었다. 바로 조선 시대 최대의 주적(主敵)이었던 일본에서 태어난 자였다.
학계가 추정하고 있는 김충선 장군의 본명은 사야가(沙也可).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른팔이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左先鋒)으로 한반도에 상륙한 그가 자신의 조국을 향해 칼날을 겨눈 데에는 사연이 있다.
본시 그는 센고쿠 시대 당시 열도에 할거(割據)하던 여러 다이묘(大名. 군벌) 가문 중 한 곳에서 태어난 인물이었다. 도요토미 세력의 침략을 막기 위해 무사로서의 길을 택했으나, 도요토미가 끝내 열도를 통일하자 그의 휘하에 들어가 철포(鐵砲)부대장이 되었다.
철포.
조총(鳥銃)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무기는 인류 전쟁사(史)를 크게 뒤바꿔놓은 병기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지상전의 주력(主力)이었던 기병대마저 먼 거리에서 강력한 살상력을 발휘하는 이 철포 앞에서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중세 에스파냐(Espana. 오늘날의 스페인)에서 첫 발명된 이 무기가 일본에 상륙한 때는 센고쿠 시대 말기였다. 도요토미가 열도를 통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유럽 무역상들로부터 철포를 도입해 실전에서 활용했으며, 당시 강력한 군벌 세력이었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기병대를 무찌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철포의 제작 기술과 제대로 된 사격 기술은 몇몇 군벌 가문에만 전수되어 극비(極祕)로 취급되었다. 김충선 장군은 이 몇 안 되는 철포 장인(匠人) 가문의 후손이었으며, 때문에 도요토미에 의해 크게 중용(重用)되었다.
하지만 김충선 장군에게는 도요토미가 미처 꿰뚫어보지 못한 이상(理想)이 있었다. 그는 단순히 피에 굶주린 채 학살을 일삼는 무인이 아니었다.
김충선 장군은 사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무인이면서도 학문(學問)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아시아 지역에서 최고의 경전(經典)으로 통용되었으며 공자(孔子)의 사상을 집대성했던 각종 유학(儒學) 서적에 심취했으며, 그에게 있어서 유학의 나라였던 조선은 동경할 수밖에 없는 유토피아(Utopia)였다.
가토의 좌선봉장에 임명되어 반 강압적으로 부산에 상륙했던 그는 그러나 상륙과 동시에 경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박진(朴晉)에게 서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김충선 장군의 전향(轉向)은 도요토미에게 있어서 크나큰 충격이었다. 동시에 일군의 패망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문치주의에 물들었다고는 하나 조선군의 전력은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다. 화약을 이용한 무기인 각종 화포(火砲)를 갖추고 있었으며, 굴복을 모르는 한민족의 기상(氣像)은 전 아시아 국가들이 인정할 정도로 드높았다.
그러나 단 하나, 철포 앞에서는 이러한 기질도 무력화될 수밖에 없었다. 일군의 가장 큰 특기는 칼과 칼이 직접 맞부딪히는 백병전(白兵戰)이었으며, 이미 약 1백년 간 서로 죽이고 죽는 광(狂)적인 전쟁을 치른 그들은 백병전의 명수들이었다.
때문에 일군은 화포 공격에 따른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조선군의 앞까지 진격해들어왔으며, 서로의 얼굴이 보일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엄청난 속도로 발사되는 철포 앞에 조선군은 그대로 지리멸렬(支離滅裂)했다. '나는 새도 잡는 총(鳥銃)'이라는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당시 조선군 병사들이 조총 앞에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이러한 가운데 김충선 장군이 가져온 철포 기술은 조선군에게 있어서 그대로 '승리의 상징'이 아니 될 수 없었다.
철포 기술을 바탕으로 조총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한 조선군은 이를 바탕으로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미 이순신 장군에 의해 해상(海上) 보급로가 막힌 상태였던 일군은 예기치 아니한 거센 공격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한양이 수복(收復)되고 일군은 그대로 부산과 쓰시마(對馬) 사이에 위치한 현해탄(玄海灘)에 수장(水葬)당할 위기에 처했다.
철포라는 신(新)병기를 이용한 공격 전술은 이러했다.
철포 부대를 여러 열(列)로 나눈 뒤 일렬이 사격하고 나면 2열이 사격하고 다시 3열이 이어서 사격하는 방식이었다. 2~3열이 사격하는 사이에 일렬에 선 병사들은 탄환을 재장전함으로서 다시 사격할 수 있었으며, 이런 방식으로 철포 부대는 쉬지 않고 탄환을 발사할 수 있었다.
물론 주변의 궁수(弓手)들도 화살을 이용해 지원사격했으며, 이렇듯 집중 사격을 받은 일군의 전열이 흐트러지고 사기가 저하된 틈을 타 기병대와 창병 등 고전적인 병종(兵種)의 병사들이 돌격해 백병전을 벌임으로서 승기를 쥐었다.
조선군의 반격에 명나라가 끌고 온 대포(大砲. Cannon) 공격까지 더해져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던 일군은 마침내 한양을 포기하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임진왜란에서의 패배로 말미암아 정치적 타격을 입은 도요토미는 곧바로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키지만 이마저 실패하자 병을 얻어 끝내 분사(憤死)했다.
*김충선 장군은 후일 경상북도 우록동(友鹿洞. 오늘날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에 정착했으며,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이 일대에 다수 거주하고 있다. 도요토미 사후(死後)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차지해 에도(江戶. 오늘날의 도쿄) 시대를 열었다. 도쿠가와는 원래부터 대륙 침공에 반대한 인물이었으며, 권좌에 오른 후 조선과 친교를 구축했다.

김충선 장군의 전술이 갖는 특성은 새로운 무기를 이용한 새로운 전술이다.
유구한 세월의 인류 전사(戰史)가 말해주듯 아무리 뛰어난 전술일지라도 세대를 앞서가는 무기 앞에서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 수밖에 없다. 서방세계가 와룡(臥龍. 잠자는 용)으로 일컬으며 두려워했던 중국이 막상 영국과 벌인 아편전쟁,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서양 문물을 도입한 일본과 벌인 청일(靑日)전쟁 등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화살과 기관총(Heavy Machine Gun)의 싸움에서는 당연히 기관총이 승리할 수밖에 없다. 1893년 영국령 짐바브웨(Zimbabwe)에서 벌어진 영국-짐바브웨 간 전투에서 4정의 기관총으로 무장한 50여 명의 영국군이 원주민 4천여 명의 공격을 막아낸 이야기는 이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남북(南北) 간 군비(軍備)경쟁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을 감당할 수 없었던 북한 정권이 핵무기(Nuclear Weapon)라는 비대칭전력을 통해 우위를 잡으려 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국군이 아무리 F-15K 전투기와 같은 첨단 무기로 무장한다 하더라도 단 1발로 수도권을 폐허로 만들 수 있는 위력으로까지 진화한 오늘날의 핵무기 앞에서는 승리할 수 없다. 김정은 집단은 이 점을 알기에 3차 핵실험이라는 무리수를 둠으로서 북중(北中) 관계를 해치면서까지 한반도 적화(赤化)야욕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특유의 호전성(好戰性)과 사방이 고립된 정치적 환경,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소위 '만경대혈통' 가문의 한반도 적화에 대한 망상(妄想)을 고려할 때 북한 정권은 핵무기를 비단 정치적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않고 군사적 무기로 활용할 가능성은 다분하다.
국방이라는 것은 '1%의 가능성도 대비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단 한 번의 전쟁으로 한 나라의 존재 여부가 결정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핵무기를 앞세운 김정은 집단의 새로운 전술에 대비하기 위해 핵 기지를 포착할 정찰위성 및 장사정 탄도미사일 등 신무기 도입에 한 층 박차를 가해야만 할 것이다.
[겨레얼통일연대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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